▲마을 표석마을 서쪽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장태욱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를 다녀간 청음 김상헌은 당시 제주의 풍토, 주민들의 생활, 목민관들의 치정, 제주의 방호시설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남사록(南槎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남사록>에는 “정의현에 병선을 정박시킬 만한 포구가 13개처”인데, 그중 한 개소로 우미포(又尾浦)를 들고 있다. 우미가 위미의 옛 지명임을 감안하면, 청음이 제주를 다녀갈 당시 이곳에 마을이 있었고, 포구를 근거로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청음은 “정의현 내 5면을 합해서 호구가 383호”이고, “성산에서 서귀까지 1백여 리인데, 거의 사람이 살지 않고 거친 띠풀이 들에 널려 있어 눈 닿는데까지 끝이 없고, 가끔 말떼들이 무리를 이룬 것이 보이어 수백 필에 이르는데, 모두 국마다”고 했다. 이런 기록에 미루어보면, 당시 이 일대 마을들의 규모는 매우 초라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각 문중에 보관되어 있는 족보나 비문들을 근거로 짐작해 보면, 위미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4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가장 먼저 이 마을에 살았던 주민은 상위미에 터를 잡고 살았던 고좌수라는 사람이라는데, 마을에는 그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고좌수는 상당한 재력가였는데, 그 위세가 대단하여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억지로 일을 시키는 일이 다반사였어도 사람들이 거절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은 지관의 지시대로 묘를 써서 장사를 지냈는데, 아들들이 갑자기 힘이 강해져서 당할 자가 없어졌다. 힘을 주체하지 못한 아들들은 이웃들에게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행패를 부렸다. 나중에 아들들이 역모 죄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그 가문은 패가망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