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태, 편법으로 처리하다 화 자초

[주장] 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 "일관성 있는 원칙 중요"

등록 2009.02.12 17:25수정 2009.02.1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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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성폭력 사태를 차분하게 되돌아보며 진정한 성찰의 기회로 삼기 위해, 죄송한 마음을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전달하겠다는 자세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쓰고 보니 '총사퇴 이후 사태가 잘 정리되는데, 오히려 찬물을 끼얹고 정파 갈등을 키우는 또다른 시빗거리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조합원과 국민의 눈높이에서 돌아보자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이 대서특필되는 신문과 방송을 보기가 두려웠다. 지난 연말까지 민주노총 간부였던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책임감 때문에, 출근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는 조합원들과 눈을 마주칠까봐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런데 혼쭐이 날까봐 대화를 피하고, 마주치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는 달리 조합원들은 차분했다. 조합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어쩌다 그런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느냐"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오히려 총사퇴 이후 우왕좌왕하는 민주노총을 염려했다. 민주노총이 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경제공황기에 노동자 서민을 살릴 수 있도록 책임있는 역할을 잘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평조합원만도 못한 모습으로 부화뇌동하는 나에 대한 자책감이 들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잘못을 했다면 공식 절차를 거쳐 이를 신속히 공개하고, 조합원과 국민의 여론을 반영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책임 있는 자세였다.

 

국민들과 조합원들의 간단명료한 판단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았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올해 투쟁과 대국민 이미지에 미칠 악영향만 걱정했지, 원칙적으로 일을 풀지 않았다. 결국 요행을 바라면서 편법으로 일을 처리하다 더 큰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은 초기부터 문제 해결의 원칙과 방법을 잘못 적용했다. 그 결과 빈대 잡으려다 초간 삼간 태우는 격으로, 사태는 어이없게도 지도부 총사퇴 공방으로 변질됐다. 국민들과 언론 눈에는 민주노총이 '잘못도 제대로 시인하지 않고 자정 능력도 부족하며, 이것도 모자라 이 와중에 정파 간 권력 싸움이나 하는 한심한 집단'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그나마 4일 만에 총사퇴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니, 조합원들은 이제 민주노총이 하루 빨리 재발 방지대책을 만들고 좀더 활동을 잘해서 신망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노조 간부들은 이러한 조합원들의 생각을 경청해야만 한다. 노조 간부들이 서로 원망의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 아직도 민주노총을 사랑하는 조합원들은 사태가 잘 해결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위상에 걸맞게 더욱 높아져야 할 간부들의 도덕수준과 실력

 

a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우문숙 대변인이 취재진에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우문숙 대변인이 취재진에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남소연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우문숙 대변인이 취재진에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남소연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은 애초부터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이었다. 80만 조합원이 있는 민주노총이라서 다양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지만, 적어도 총연맹 주요 간부라면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자세를 생활화해야 했다.

 

문제는 성폭력 사건에 그치지 않고 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예방하지 못했고 심지어 조작·은폐 논란까지 벌어졌다. 이 대목에서 민주노총 내부 정파 간 '제 식구 감싸기'라는 오해와 감정 개입 갈등구조가 합리적 해결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해 볼 일이다.

 

'내가 하면 예술이고, 남이 하면 외설'이라는 정파 간 이중잣대, 진보진영의 교만한 편가르기식 사고도 도마에 올려 논쟁하고 상식과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 꼬투리가 잡히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이에 대해 물타기로 방어하면서 답도 없는 논쟁을 일삼는 상호비방의 소모전을 끝내야 한다.

 

민주노총 같은 큰 조직이 갈등을 잘 해결하려면 일반성의 원리가 쉼 없이 작동해야 한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 사익을 앞세워 편을 가르는 정파들은 함량 미달의 이중잣대를 서로 들이대면서 민주노총을 늘 어렵게 한다. 이런 '탐욕의 정치'도 함께 개선되어야 한다.

 

민주노총이 상식적인 규율을 회복하려면 '민주노총 조직으로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을 접어야 한다. 시민사회 일원으로서, 이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양심을 바탕으로 문제를 대해야 한다. 

 

내부에서 해결할 일, 사법처리할 일 구분해서 처리해야

 

a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한 간부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한 간부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남소연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한 간부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남소연

민주노총 간부들은 품성과 지도력이 검증된 사람이 아니다. 청렴하게 자기관리를 해왔는지 내부 검증장치도 부족하다. 하다못해 정치권에서도 인사청문회나 후보검증을 하는데, 민주노총은 그런 장치도 없이 투표하여 표가 많이 나오면 노조 간부로 뽑힌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노동운동에 잘못 도입된 것 같다.

 

민주노총 80만 조합원들이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서 이런 사건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게 더 두렵다. 해결을 위한 내부 진상조사 과정에서 이미 조직적 은폐가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재발방지를 약속한 지 며칠도 안돼 기자들의 추적에 의해 또 비슷한 사건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입에 발린 재발 방지대책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아있는 문제들을 간추리고 공식 심의기구를 통하여 내부적으로 해결할 문제와 사법처리를 통해 일벌백계할 문제 등을 처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사자 간 합의가 안돼 조직적 은폐의혹을 살 수 있는 사건은 사법기관에 신고하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고질적인 정파 간 이중잣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관성있는 원칙을 만드는 등 특단의 조치가 검토되어야 한다.

 

사랑 받는 민주노총으로 거듭나자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민주노총에 대한 높은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민주노총은 총사퇴를 하는 것으로서 책임을 다한 게 아니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민주노총을 만들어가는 데 총력을 모아야 한다. 겸허하게 조합원과 국민의 눈높이에서 진정성 있게 투쟁하는 자세만 회복한다면 민주노총은 국민들에게 사랑 받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제 민주노총은 한편으로는 내부 자정을 결의하고 재발 방지대책을 세우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명박 정권과 자본의 잘못된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성실히 하는 것으로 노력을 다해야 한다. 적극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면, 자세를 낮추고 조합원과 국민이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진정성을 갖고 호소해야 한다.  민주노총의 위상 회복은 간부들이 이러한 노력을 얼마나 성실히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지막으로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과도한 비난과 국민들의 애정 어린 비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총은 태생적으로 노동자 서민의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말라죽는 나무다. 그래서 감히 욕심을 부려본다. 국민들은 민주노총에게 한편에는 감시와 비판의 회초리를 들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박수 칠 때까지 더 잘 싸우라'고 격려해 주시길 바란다.

 

"민주노총은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정의를 위해 투쟁합니다. 저부터 거듭 태어나 (이 파 저 파가 아닌) 민주노총파가 되겠습니다. 힘든 시기 민주노총을 아끼고 사랑해 주십시오."

2009.02.12 17:25ⓒ 2009 OhmyNews
#민주노총 성폭력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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