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하니아들이 한창 기어다닐때 사진, 지금은 춤추고 뛰어다니니 유아의 빠른 변태(變態)(?)를 세삼 느끼게 된다.
임준연
결국 다운증후군 수치가 꽤 높게 나왔음에도 우리 부부는 양수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의사는 우리의 결정에 인상을 그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출산을 돕는 병원이 아닌 검진만 하는 곳인 데다가, 우리는 그런 의사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병원을 옮겼고 아이를 낳는 곳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전주 산부인과로 정했다.
서울에서 전주로 옮겼는데, 예정을 한 달이나 앞둔 시점에 양수가 터져서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진료와 처치를 받고,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대기하라는 권유를 무시하고 그날 마침 쉬고 있던 친구의 차를 빌려서 전주까지 달렸다.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비용도 중요하고 환경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산후조리원도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낳는 때까지 속을 썩이고 나온 아들은 예정보다 무려 4주나 앞당겨서 나왔지만 3kg정도의 평균체형이었고 놀라울 속도로 잘 자라서 현재 누가 보든 건강하고 튼튼한 22개월 유아로 성장해 있다.
아기를 기르면서 둘째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해왔지만 아내는 지금의 튼튼한 아들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한 달여 전에 생리가 늦어진다고 테스트 해본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이 나오자 오히려 기뻐하며 이번엔 스트레스 안 받고 태교 잘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내 모습도 행복했다.
하지만 엄마가 준비가 덜 된 것인지 아니면 아빠가 준 ‘씨앗’이 부실한 것인지 몰라도 4주째 하혈이 시작되고 산부인과에서 ‘절박유산’을 판정하고 안정을 요구했을 때 우리 부부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때맞춰 동네에 물도 나오지 않는 사태로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내가 직장을 다녀 주말에 병원에 들렀는데 결국 ‘계류유산’ 판정을 했다. 당일 먹은 것이 있어서 수술이 안 된다고 비우고 다음날 수술을 예약하고 왔다.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전부터 울었을 아내는 나를 보자 무너지면서 흐느꼈다. 차에다 아이를 재우고 나온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저리게 아팠다. 애써 태연한 척 다음에 더 건강한 아기 낳으려고 그러나 봐. 울지 말라고, 다른 산모들이 불안해하지 않겠느냐며 위로 반, 강요 반 하며 손을 잡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