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루스의 꿈

등록 2009.02.19 10:36수정 2009.02.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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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한 가지라도 지키자’는 기치(?) 아래 결심한 일이 “한 달에 두 번 이상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이다. 작심 3개월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2월에 본 두 번째 영화이니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영화관에 가기 전에 서둘러 영화평을 읽으려고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니 대부분 영화관련 소식이지만 ‘대한민국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청와대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등등도 함께 검색된다. 제목만 보아도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고, 시간도 없어서 영화평만을 읽고 덮어두었다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이 하나 있다. 이카루스의 꿈도 되살아날까?

 

 대한민국의 시간을 1980년으로 되돌리는 ‘짧은 시간여행’에 빠진 것은 이 때문이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 일에 태어난 남자로부터 시작하여 2005년 그의 연인이었던 한 여자의 죽음까지 무려 87년의 세월을 더듬고 있는 영화에 비하자면 28년 전으로 시계를 돌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 성 싶었다. 하지만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였으니 예상하지 못한 고된 일이 된 셈이다. 원인은 시간여행 길에 다시 마주친 마티스의 그림 ‘이카루스’에 있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 밀랍이 녹아 추락한 무모한 이카루스는 유명 화가들에게 좋은 미술소재이다. 그런데 다른 화가들이 이카루스의 ‘추락’을 그린 반면 마티스는 이카루스의 ‘열정’을 그렸다. 선명하고 부드러운 파란색 몸뚱이와 왼쪽 심장 부근 오직 하나의 붉은 점. 마티스는 젊은 이카루스의 무모함에서 붉은 열정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꿈을 본 모양이다. 아니 필자가 그렇게 보았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든가.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그 그림을 잊지 못하였고 결국 다시 맞닥뜨린 것이다.

 

 만약 1980년대 한국으로 되돌아간다면 수 많은 이카루스를 보게 될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눈부신 젊은 열정을 곳곳에서 마주칠 것이다. 젊음 탓일 수 있다. 하지만 젊다고 하여 다 이카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특정 시기에 집단적으로 그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랑과 명예도 마다하고 목숨을 내거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도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니다.

  

 앙리 마티스 <재즈 이카루스> (1947)

사진 출처 - 네이버
앙리 마티스 <재즈 이카루스> (1947) 사진 출처 - 네이버 인권실천시민연대
앙리 마티스 <재즈 이카루스> (1947) 사진 출처 - 네이버 ⓒ 인권실천시민연대

 하지만 마티스의 이카루스 보다는 브뤼겔의 이카루스가 그 이후 한국의 현실에는 더 걸맞을지도 모른다. 브뤼겔의 그림에서 이카루스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가 그린 평화로운 어느 농촌의 풍경 속에는 바다에 추락한 젊은이의 흔적이 오른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남아있을 뿐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카루스의 다리 때문에 그림을 본 후 참으로 씁쓸하였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감정을 박사학위를 마치고 처음 섰던 강단에서 경험하였다.   

 

 사회운동론 강의를 하였던 당시 필자는 강의 시간에 1980년대 비디오를 보여준 적이 있다. 광주학살 비디오를 본 학생들은 경악했지만 그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필자도 내심 놀랐다. 굳이 역사학자 카(E.H.Carr)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현재 진행형일지 모르는 불과 20여년 전의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아득한 옛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면 되살아나는 것 속에 이카루스의 꿈도 있을까”에서 급기야 “그 많던 이카루스는 다 어디로 갔을까”로 번졌고 덕분에 눈이 뻘개져서 출근하였다.

 

 그래도 요즘 같은 경제위기 시기에 출근할 안정적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임시, 일용직 일자리가 줄었고 상용직 마저 줄어들고 있다는 2009년 1월 고용동향 자료를 충혈 된 눈으로 읽다보니 직장이 있어 시간여행이라도 한다 싶다. 이번 경제위기는 1997년과 다르다. 그때는 대기업 근로자도 구조조정에 내몰리는 등 임금 근로자 전체가 위기에 직면하였다면 이번의 경제위기는 아래로부터 시작된다. 일용직, 자영업자, 임시직, 상용직 순으로 일자리가 줄고 중소영세사업장부터 문을 닫는다.

 

또한 대다수 국민이 경제위기라는 강물에 빠진 1997년에는 대기업과 상용직 순으로 구명대에 올라타 그 이후 10년간 한국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번 경제위기는 순서대로 빠진다. 아니 구명대에 올라타지도 못한 채 10년을 버티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급류에 휘말렸다. 게다가 지난 경제위기의 극복속도가 매우 빨랐다면 이번 경제위기는 그렇지 않다. 경제위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를 예측하기가 두려워 고용동향 자료를 읽기가 무섭다. 

 

 하지만 학자는 무릇 진실 앞에서 두려워 말아야 하며, 최소한 사실이라도 잘 모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가끔 종군기자가 겪을 법한 고민에 사로잡힌다. 내가 그 사진을 찍는 동안 사람이 죽어가는데,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하나 그 현장을 찍어 전 세계에 알려야 하나. 그러나 이카루스까지 포함한 그 역사를 찍어내는 것이 연구자로서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최소한의 의무일 것이라고 믿으며 더 이상의 질문을 접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은수미씨는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2.19 10:36ⓒ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은수미씨는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국현실 #시간되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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