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영적인 수행
.. 동양에서 임신은 하나의 영적인 수행으로 여겨진다 .. <엄마들을 위하여>(재클린 크래머/강오은 옮김, 샨티, 2007) 15쪽
'하나의'는 덜어냅니다. 서양사람들은 '관사'라는 것을 으레 붙이기 마련이지만, 우리 말투에서는 '하나의 수행'이나 '하나의 공부'가 아닌 '수행'과 '공부'라고만 말합니다.
┌ 영적(靈的)
│ (1) 매우 신령스러운
│ - 너는 영적 존재를 믿는가? /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다
│ (2) 정신이나 영감을 통한
│ - 영적 교감 / 영적 감응 / 영적인 반응 / 영적인 체험
├ 영(靈)
│ (1) = 신령(神靈)
│ - 진퇴를 결정할 때면 영의 계시로 모래 위에 쓰인 글씨를 가지고 판단했다
│ (2) = 영혼(靈魂)
│ - 천당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내세에 영이 사는 처소로서는 같은 셈이지
│
├ 영적인 수행으로 여겨진다
│→ 마음을 닦는 일로 여겨진다
│→ 마음 다스리기로 여겨진다
│→ 마음닦기로 여겨진다
└ …
'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나, 그냥 '신령'과 '영혼'이라는 말을 쓸 때가 한결 낫지 싶습니다. 이렇게 적을 때 알아듣기 더 나을 테며, '영혼'보다는 우리 말 '넋'이나 '얼'을 찾아서 쓰면 더욱 좋습니다.
그나저나, "영적 존재"나 "영적인 세계"는 무엇을 말할까요. "영적 교감"이나 "영적 감응"은 또 무엇을 말할까요. "영적인 반응"과 "영적인 체험"은 얼마나 깊은 우리 넋과 얼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신령'과 뜻이 같다는 '영'이라는데, '신령'이란 "신기하고 영묘함"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신기(神氣)'란 "신비롭고 불가사의함"을 가리키고 '영묘(靈妙)'는 "신령스럽고 기묘함"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신비(神秘)'는 다시 "신기하고 묘함"을 가리키고 '기묘(奇妙)'는 "이상하고 묘함"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령'은 '신비'이고, '신비'는 '신기'이며, 다시 '신령'으로 돌아옵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영'과 '영적'을 헤아리면 도무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예 우리들 느낌과 생각으로 짚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님'이라고, '하느님과 같은 님'이라고 헤아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국어사전에 나온 보기글은 차라리, "너는 하느님을 믿는가?"라든지 "너는 거룩한 님을 믿는가?"라든지 "너는 하느님 같은 넋을 믿는가?"라고 풀어내면 어떠할까 생각해 봅니다. "마음속 깊은 세계를 겪어 보다"로 풀어내 보기도 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남"이나 "넋으로 느낌"으로 풀어내 보기도 합니다.
그래도 두루뭉술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머리가 어지럽히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알맞춤한 낱말을 빚어내지 못하고 자꾸자꾸 바깥에서 어설피 '-적'붙이 낱말을 들여오느라 우리 느낌과 생각을 알뜰히 담아낼 말 또한 잃어버리는구나 싶습니다.
ㄴ. 영적인 생활
.. 의심하고 잡념에 빠지고, 헛된 의문을 계속 품는 한 결코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 <사티쉬 쿠마르>(사티쉬 쿠마르/서계인 옮김, 한민사, 1997) 47쪽
"잡념(雜念)에 빠지고"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고"나 "허튼 생각에 빠지고"로 다듬습니다. "헛된 의문(疑問)을 계속(繼續) 품는 한(限)"은 "헛된 물음을 끝까지 품는다면"이나 "헛된 생각에 자꾸 사로잡히면"으로 다듬어 봅니다. "할 수 없을 것이다"는 "할 수 없으리라"나 "할 수 없다"로 손봅니다.
┌ 영적인 생활을 할 수
│
│→ 넋을 가꿀 수
│→ 마음을 갈고닦을 수
│→ 믿음을 키울 수
└ …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신 넋이나 얼이 곧추설 수 있도록, 한 점 티끌이나 더러움이 깃들지 않도록 애쓰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자기한테 한 가지 믿음을 마음 한복판에 새겨 놓습니다. 이 믿음이 더욱 단단할 수 있도록 힘쓰고, 야무지게 가꾼 믿음으로 이웃들한테 즐겁고 너른 말씀을 나누어 줍니다.
자기 믿음을 가꾸는 일은, 자기 스스로 더욱 너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움직임입니다. 자기 스스로 한결 깊고 포근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씀입니다. 자기 스스로 조금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고자 하는 매무새입니다.
ㄷ. 영적인 사람
.. "당신은 영적인 사람이니까 그 따위 음식이 필요없지만" .. <사막의 지혜>(유시 노무라/이미림 옮김, 분도출판사, 1985) 47쪽
'음식(飮食)'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밥'이나 '먹을거리'나 '끼니'로 다듬어 주면 한결 낫습니다. '필요(必要)없지만'은 '없어도 되지만'이나 '안 먹어도 되지만'으로 손질합니다.
┌ 영적인 사람이니까
│
│→ 믿음으로만 사는 사람이니까
│→ 믿음만 먹는 사람이니까
│→ 마음만 살찌우는 사람이니까
└ …
마음을 갈고닦는 일도 소담스레 여겨야 하지만, 마음뿐 아니라 몸도 갈고닦아야 함을, 그리고 마음을 살찌우는 일도 값지지만, 마음뿐 아니라 몸도 살찌워야 함을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이리하여 살포시 비꼬듯이 말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믿음만 먹고 살아가니까 그 따위 밥은 안 먹어도 되지만"쯤으로. 또는, "당신은 마음만 살찌우면 그만이니까 그 따위 밥은 없어도 되지만"쯤으로. 아니면, "당신은 머리만 쓰는 사람이니까 그 따위 밥은 굶어도 되지만"쯤으로.
그런데, 우리 스스로 '영적'이 어떤 모습인지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면서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이 말을 집어넣고는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알맞는 자리에 알맞게 쓰는 말이 아닌 채 한 해 두 해 이어오면서, 이제는 영영 돌이킬 수 없도록 우리 말과 글이 헝클어져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2009.02.24 17:54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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