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덟 살 되던 1957년 3월 군산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가슴에 옷핀으로 손수건을 걸고 그 위에 큼지막한 이름표를 달고 셋째 누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는데요. 화려하게 차려입은 엄마와 이모, 무명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식모, 할머니가 따라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사내들은 오가는 길만 알아놓으면 된다"라고 하시던 엄한 아버지 밑에서, 부모 손을 잡고 학교에 간다는 것은 꿈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모표가 달린 검정 모자에 하얀 깃이 달린 교복을 차려입고 누님을 따라가는 것만도 행복이었지요.
입학식을 하는데, 이름표도 달지 않은 채 단추가 2개나 떨어져 나간 교복차림으로 허공만 바라보는 아이, 누구에게 물려받았는지 무릎에 구멍이 나고, 닳고 닳아 회색으로 바랜 교복을 입은 아이, 만화에 나오는 사냥꾼처럼 보자기를 둘둘 말아 등에 걸치고 웃고 시시덕대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혼자 왔는지 선생님이 뭐라고 하건 말건 장난을 치고, 입학도 하기 전에 싸우는 아이도 있었는데요. 처음 해보는 단체생활에 대한 호기심, 즐거움, 두려움 등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한 살 아래지만 가장 친했던 조카가 있었는데요. 큰 누님 제의로 함께 입학을 했고 같은 반으로 편성되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새로운 친구들이지만, 모두가 낯선 얼굴들인데 조카가 있으니까 든든하더군요. 조카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입학하기 전 어머니와 큰 누님을 따라 책가방을 사러 갔을 때 일입니다. 큰 누님은 아들(조카)에게 토끼가 그려진 비싼 가죽가방을 골라주는데, 어머니는 그림도 없는 싼 가방을 사주더라고요. 투정을 부려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긴 책가방 대신 보자기를 등에 걸치고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으니 오히려 감사해야겠지요.
당시만 해도 입학 전에 하나에서 열까지만 셀 줄 알아도 똑똑한 아이로 인정받았고,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들이 한 반에 1-2명 있었는데 그들은 귀족대우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군산에 유치원이 '둔율성당'에서 운영하는 '성심유치원' 하나밖에 없었고, 부잣집 자녀만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었거든요.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학교생활
제가 속한 1학년 3반 담임은 학교 정문 옆에서 문구점을 경영하는 '이윤석 선생님'이었는고, 당시 환갑이 코앞인 아버지만큼이나 늙어보였는데요. 처을 불러보는 '선생님'이어서인지 그래도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앞서 걸어가면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하나, 둘!" 하면 우리는 큰소리로 "셋, 넷!" 하며 앞마당 병아리들이 봄나들이 가는 것처럼 따라갔고, 조금 익숙해지니까 호루라기만 불어도 박자를 잘 맞췄는데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추억입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은 열성적인 학부모들이 교실 뒤에 서서 우리가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요. 소풍을 갈 때도 찬합에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서 따라오는 젊은 엄마들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1학년 봄 소풍 때 셋째 누님이 따라왔고, 그 후에는 혼자 다녔거든요.
학부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놀이터 옆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야외수업을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알고 보니 교실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저에게는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로 시작해서 '어깨동무 내 동무', '철수와 영이', '바둑이' 등이 들어가는 국어 교과서가 가장 기억에 남고요. 교과서 마지막 장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공산침략자를 쳐부수고,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라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맹세>가 적혀 있었습니다. 학습장(공책)은 흔히 '똥 종이'라고 부르는 회갈색 재생지와 갱지가 재료였고, 인쇄도 조악했습니다.
전교생이 5천 명에 이르고, 우리 학년은 13반까지 있었는데, 한 학급에 80명이 넘는 그야말로 콩나물 교실이었습니다. 거기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에 세 명, 네 명이 앉기도 했는데요. 의자 사이로 엉덩이가 끼면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고, 싸움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상대방 연필 심 부러뜨리기, 책상 가운데에 줄을 그어놓고 내 자리를 침범하지 말라며 짝꿍과 다투기는 예사고, 교실 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편을 갈라서 싸우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싸우고도 이튿날 만나면 깔깔 웃으며 반가워했던 것을 보면 싸움도 일종의 놀이였던 것 같습니다.
학생이 워낙 많다 보니까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다니기도 했는데요. 오후반일 때는 시간차를 극복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오후반일 때는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는데, 학교에 가는 것인지, 놀러 가는 것인지 헷갈려서 혼났으니까요.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요. 하루는 가정환경 조사를 하면서 집에 목욕탕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기에 들까 말까 망설이다 손을 들었는데 저 혼자라서 겸연쩍더군요. 김장 때 소금에 절인 배추를 담가놓는 작은 수조탱크가 샘가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목욕을 몇 번 했던 적이 있어서 손을 들었던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하나같이 "그게 무슨 목욕탕이냐!"라며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 것이었습니다. 사실대로 답을 하고도 놀림만 당했지요. 지금도 형제들이 모이면 그 얘기를 하며 웃는데 저는 벌쭉이고 맙니다. 훗날 알았지만, 목욕탕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잊을 수 없는 선생님과 교우들
부모가 양품점을 했던 현철이(미국거주), 보석상을 했던 덕인이, 약국을 했던 대현이, 모자점 아들 중신이, 아버지가 주스·사이다 공장을 했던 우표는 번화가에서 살았고, 밤이면 묘지 위로 도깨비불이 날아다니고 뒷산에서 유골이 나온 얘기를 해주던 만성이, 을성이, 덕근이, 동춘이 등도 잊지 못할 교우들입니다. 몇몇은 중·고등학교도 함께 다녔기 때문에 지금도 만나고 있지요.
이윤석 선생님은 2학년까지 2년 동안 담임을 맡으셨는데요. 살아계신다면 90세도 더 되셨겠네요. 부디 건강하시고 백수, 천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70년대 후반으로 기억하는데요. 무더운 여름날 부안가는 버스에서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먼저 알아보시더군요. 공부를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니고, 반장도, 부반장도, 분단장도 아니었거든요.
만날 당시 정년을 몇 년 앞두고 계신다는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으셨을 때 전해지는 온기는 복더위를 잊게 했고, 하찮은 제자를 기억해주시는 선생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잊지 않고 찾아주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사회생활의 첫 걸음을 내디뎠던 초등학교 입학, 그때는 학교 가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는 가고 싶은 곳, 재미있는 곳, 꼭 가야만 하는 곳으로 여겼으니까요. '조기교육' '조기유학'이 없었어도 그 시절 학교는 그랬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3.05 09:43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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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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