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사망 불행하지만 시위는 민주화운동
 학생도, 전경도 모두 암울한 시대의 희생자"

[동의대사건 재조명 ④ - 인터뷰] 20년 전 학생들 변론 맡았던 문재인 변호사

등록 2009.03.11 10:20수정 2009.03.1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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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3일 같은 당 의원 12명과 함께 '민주화운동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전 의원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민주화 운동으로 결정한 사건 가운데 사실 왜곡 소지가 있었는지를 철저히 재심의할 필요가 있다"며 1989년 5·3 동의대 사건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오마이뉴스>는 현장 취재 및 20년 전의 기록(법정 진술 및 수사기관 발표문, 국회 속기록,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지난 3회에 걸쳐 동의대 사건의 진상을 재조명했다. 마지막회는 20년 전 학생들을 변호했던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고범산 5·3 동지회 회장의 인터뷰다. [편집자말]
 문재인 변호사
문재인 변호사이종호
"동의대 사건으로 경찰이 사망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학생들이 시위·농성에 이른 과정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생긴 일로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보위)에서 판단한 것이다. 민보위 결정과 법원 판결은 모순되지 않는다."

동의대 사건 때 학생들의 변호를 맡았던 문재인 변호사는 지난 5일 '법무법인 부산' 사무실에서 이뤄진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 변호사는 당시 사고 현장에 진입한 전경들 중에 화염병을 집어던진 대학생 윤OO씨의 친구도 있었음을 소개하면서 "신분만 다를 뿐이었지, 학생·전경 모두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다. 언뜻 가해자와 피해자로 비칠지 몰라도 권위주의 시대의 폭압 속에서 똑같이 희생을 치러다"고 회고했다.

문 변호사는 "학생이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맞지만 경찰이 진압 수칙만 잘 지켰더라면 끔찍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 1989년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한 민보위의 결정을 재심의하려는 법안이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에 의해 발의됐다. 2002년 민보위의 결정이 올바르다고 보나?
"학생들의 시위·농성을 통해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한 것은 분명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경찰관들이 여러 명 사망하고 부상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 일 때문에 사건 자체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민보위 결정은 법원의 과거 판결을 뒤집고 당시 학생들의 행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민보위 결정과 법원 판결은 모순되지 않는다. 경찰이 사망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학생들이 시위·농성에 이른 과정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생긴 일로 판단한 것이다.


누군가 7층 바닥에 석유를 뿌렸고, 화염병으로 인해 불이 났다고 치자. 그렇다면 사고와 무관한 학생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농성을 한 게 아니냐? 대다수 학생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의 법안은 민보위의 기능을 오해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 '오해'라는 게 무슨 뜻인가?
"이런 비유를 하고 싶다.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지정할 때,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주의 활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과 조국 독립에 기여한 것은 별개의 문제인데, 지금도 이를 싸잡아서 '빨갱이가 무슨 유공자냐'는 식으로 비난하는 분도 있다. 이런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조국의 독립에 기여한 것은 맞지 않나? 동의대 사건도 민주화 운동의 성격이 있는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고 학생들의 폭력성 부분은 별개로 판단하자는 얘기다."


"다친 전경 중에 화염병 던진 대학생 친구도 있었다"

- '당시 학생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라면 경찰은 뭐가 되냐'는 비판이 많다.
"이 문제를 경찰과 학생의 대립으로 보는 게 안타깝다. 신분만 다를 뿐이었지, 학생·전경 모두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다. 언뜻 가해자와 피해자로 비칠지 몰라도 권위주의 시대의 폭압 속에서 똑같이 희생을 치른 것 아니냐?

심지어 도서관에 진입했다가 부상한 전경들 중에는 동의대생이 한 명 있었는데, 7층에서 화염병을 던진 학생 윤OO씨의 친구였다고 한다. 그 전경은 도서관 구조를 잘 아는 터라 출구를 재빨리 찾아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다른 전경들은 그렇지 못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냐?

경찰들은 상부에서 명령하니 무리한 작전에 동원됐을 뿐이다. 경찰 진압에 무리가 없었다면 왜 그날 오전에 시경 기동대원들이 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항의시위를 했겠나? 경찰도 학생들과 똑같이 희생자라고 봐야 한다."

- 사망경관 7명 중 추락한 4명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나?
"그 당시에도 고층건물 진압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농성자들이 우왕좌왕하다가 추락하거나 투신하는 일이 있었다. 진압경찰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매트리스와 안전 그물을 준비해야 했고, 현장 근처에 가져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7층에 화재가 났고, 경찰들이 창틀에 매달려서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는데도 경찰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동료들이 4명이나 사망했다. 20년 전에는 경찰관들의 죽음에 대한 비난으로 진실이 묻혔지만, 요즘이라면 경찰 지휘관들에게 대한 책임 추궁이 충분히 이뤄졌을 것이다.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면 시민사회가 용납하겠나?"

- 7층 도서관에 화재가 생긴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한 학생이 화염병을 바닥에 던진 건 맞는데, 이것이 어떻게 화재로 연결됐는지가 재판의 쟁점이었다. 수사 단계에서는 '석유와 시너를 바닥에 뿌렸다'는 일부 학생의 진술이 나왔지만, 법원에서도 '현장에 시너가 없었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학생들이 옥상으로 도망가면서 7층에 내버려둔 화염병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수색과정에서 이것이 깨지거나 넘어져서 안에 있던 유류가 흘러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1989년 5월3일 오전 동의대 진압작전과 관련해 부산시경 앞마당에서 항의농성하고 있는 부산시경 기동1·2중대원들의 모습.
1989년 5월3일 오전 동의대 진압작전과 관련해 부산시경 앞마당에서 항의농성하고 있는 부산시경 기동1·2중대원들의 모습.동의대 5·3동지회
1989년의 동의대도 2009년 용산처럼 현장에 화염병이 많았기 때문에 진압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경찰도 알고 있었다.

경찰 돌파조와 수색조, 소화조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함께 움직였는데, 7층에 와서는 대열이 완전히 흐트러져버렸다.

화재가 나기 직전에는 분말액을 다 써버린 소화기를 든 전경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진압 수칙에 반하는 것이었다.

학생이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진압 수칙만 잘 지켰더라면 학생들이 훨씬 위험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끔찍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들이 아무리 위험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진압경찰이 올라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목적이었지, 전경들을 죽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윤씨가 던진 화염병은 유류 위에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불길은 서서히 가라앉아 있었는데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도 규명되지 않았다.

검찰은 유증기 발화 이론을 제시했고, 변호인단도 그러한 조건에서 화재가 가능한지를 따지는 모의실험을 제안했지만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이 마음만 먹었다면 폐건물을 하나 구해서 실험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의지가 없었다. 권위주의 시절의 재판이라는 게 그런 식이었다."

- 1989년 동의대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해서 20년 후 용산 참사가 터졌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날 밝으면 피랍전경들을 풀어주겠다'는 학생들의 약속이 있었는데도 당일 새벽 경찰이 학교에 진입한 점이다. 용산 참사도 경찰이 진압을 서두르다가 생긴 일 아니냐?"

- 당시 여론을 좌우한 언론에 대해 아쉬운 점은 없나?
"경찰관 여러 명이 진압과정에서 죽고 다치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건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면도 있었다. 어쨌든 언론들은 처음부터 '학생들이 엄청난 양의 석유와 시너를 바닥에 뿌려놓고 경찰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을 붙여서 죽였다'고 전했고, 사람들의 인식도 이 보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권은) 이러한 언론보도를 학생들의 과격성·폭력성을 비난하는 데 써먹었고, 신공안정국이 조성됐다. 재판과정에서는 사실이 아닌 부분들이 상당 부분 드러났음에도 언론이 제대로 다뤄주지 않았다. 경찰들의 죽음도 한스러운 일이지만, 과도한 비난에 시달린 학생들도 큰 상처를 받았다."

- 1989년 통일민주당을 중심으로 국정조사 얘기가 나오다가 민정-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면서 흐지부지됐다. 지금이라도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보나?
"법원에서 화재원인을 명백히 가려내지 못했고, 경찰 지휘부의 과실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한 진상이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제대로 조사해줬으면 한다."

- 아무리 그래도 순직경찰 유족들의 섭섭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유족들이 시위 학생들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경관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보면 안 된다. 학생들이 아니라 그들을 위험한 진압 현장으로 내몬 정부에 책임을 묻는 게 맞지 않나? 이정이 부산민가협 대표는 부산에서 양측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한 분인데, 그런 분이 (전여옥 사건으로) 구속돼서 안타깝다."
#동의대 사건 #고범산 #동의대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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