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내 스타일이야! 이란의 온천 마을 '샤레인'

[이란 여행기 11] 40년 쌓인 피로, 온천으로 풀까?

등록 2009.03.20 11:08수정 2009.03.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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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위 사진은 이란의 유명한 산촌마을 마슐레입니다. 사실 샤레인은 이곳처럼 예쁜 모습은 하나도 없습니다. 꾸민 흔적이 없이 생긴대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이 좋았습니다.

위 사진은 이란의 유명한 산촌마을 마슐레입니다. 사실 샤레인은 이곳처럼 예쁜 모습은 하나도 없습니다. 꾸민 흔적이 없이 생긴대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이 좋았습니다. ⓒ 김은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참 인상 깊게 봤었습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 사실 내용은 기억 안 납니다. 그래도 어떤 느낌은 오롯이 살아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간다는 것, 그곳은 아주 많은 눈이 내린 곳이라는 것. 높이 쌓이는 눈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겠지요.

주인공 시마무라가 산골마을로 들어서면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 세상이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저 세상은 조용하고 느리게 걸어가는 세상이었지요. 그래서 난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저 세상으로 간 그를 부러워했었습니다.


그 소설을 읽을 때 난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으로 기어들어가 오두막에서  몇날며칠 자고 싶은 그런 만성적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나의 그런 욕망에 부합하는 맛이 있었습니다.

샤레인 온천 마을은 <설국>에서 느꼈던 그 정서를 환기시키는 곳이었습니다. 눈을 뚫고 우린 이곳으로 왔습니다. 사람이 북적거리고 자동차가 주는 위협이 만만찮은 곳 테헤란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우린 고즈넉하고 자그마한 이 마을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설국>을 기억해내는 것이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샤레인은 <설국>에 나오는 마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 눈이 깊게 쌓여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눈을 뽀드득 밟으며 숙소를 향해 걸어갈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밤 내내 버스 의자에 앉아오느라 좀 지쳐있었기 때문에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모처럼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기대했던 것처럼 고즈넉하고 자그마한 동네

이란 여행을 떠나오면서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첫날은 비행기 의자에서 보냈고, 다음날은 다섯 명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에 들었는데 낯선 사람과 함께 보내는 밤이 편치 않았고, 그리고 어제는 또 버스 의자에서 토막잠을 잔 게 전부입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굉장히 지쳐있고 깊은 잠을 자서 의욕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샤레인은 나의 이런 욕망을 채워주기에 정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조용하고 작은 동네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가족만 쓸 수 있는 침대 세 개가 있는 방을 갖게 됐습니다. 더욱이 이곳은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지는 온천지대입니다.

이곳이야말로 여행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이란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목욕을 위한 물품을 챙겨 밖으로 나왔습니다. 


a  사거리서 찍은 양 잡는 풍경. 이 날은 햇빛이 참 찬란했기에 해가 드는 도로는 눈이  녹으면서 질퍽했다.

사거리서 찍은 양 잡는 풍경. 이 날은 햇빛이 참 찬란했기에 해가 드는 도로는 눈이 녹으면서 질퍽했다. ⓒ 김은주


도로에는 차가 거의 안 다녔습니다. 그러니 테헤란에서와 달리 차에 치일 거 걱정 안 하고 편안하게 걸어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길에는 사람도 별로 안 다녔습니다. 마침 차도르를 걸친 여자가 열 두어 살로 보이는 아들과 함께 우리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스파'라고 했습니다. 전혀 못 알아듣더군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 작은 애가 다리하고 팔을 씻는 시늉을 하니까 그제야 알아듣고 우리가 걸어가던 반대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차도르 여인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걷다가 양을 잡는 남자들을 봤습니다. 그들은 검은 현수막이 걸린 사거리서 양을 잡고 있었습니다. 여러 마리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양이 죽는 끔찍한 장면을 들여다볼 만큼 강심장이 아니어서 멀찍이서 사진을 찍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 잡은 양들은 작은 동네 샤레인의 마을 잔치를 위한 희생양이었습니다. 지난 번 테헤란에서 야슈라 축제 때 길거리서 음식을 얻어먹었는데 이 마을은 오늘 길거리서 퍼레이드도 하고 음식도 나눠주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도 목욕하고 나오다가 길거리서 나눠주는 양고기 케밥을 얻어먹었는데 그 양고기가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죽어가는 양이었습니다.

우린 샤레인을 찾은 최초의 한국인

숙소에서 나와 온천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는데 한 시간도 안 돼 샤레인을 다 돌아봤습니다.  길대장이 아마도 우리가 샤레인을 찾은 최초의 한국인일 거라고 했는데 이 말로 봐서 이곳은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관광지다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만큼 상업화가 덜 된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어느 이름 없는 면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곳은 의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갑니다. 급할 것 없는 사람들이 삽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속도가 좋았습니다.

난 샤레인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내 소원이 이런 작은 동네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느즈막히 일어나 책 읽다가 배고프면 나와서  뭐 사먹고 좀 어슬렁거리다가 또 들어가 책보는 것인데, 이 마을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여행을 하기에 적격인 곳으로 보였습니다.
#이란 #샤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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