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터널호치민의 주요 관광자원
이희동
우리가 향한 구찌터널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을 가장 괴롭혔다는 바로 그 베트콩 땅굴 중 하나로서 호치민에서 가장 가까운, 그래서 미국에 가장 위협적인 땅굴이었다고 한다. 총 길이는 250km에 이르고 깊이는 지하 30m 이상 된다는 구찌터널.
안 그래도 적과 아군, 민간인과 군인이 분명하지 않았던 남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은 이와 같은 땅굴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했을 것이며, 낯선 환경 속에서 적응하기 힘들었을 미군들은 그와 같은 베트콩의 움직임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니 배후에다 적을 남겨놓지 않으려고 양민인건 군인이건 죄다 학살하지.
구찌터널에 대한 설명을 처음 접하면서 떠올렸던 건 우리나라의 빨치산이었다.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던 베트남 사람들이 게릴라 활동을 하기 위해 처음 땅굴을 만들었고, 이후 베트남전이 발발하자 기존의 땅굴을 이용하여 미국에 저항했다는 이야기가 우리네 빨치산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베트콩은 승리를 거둔 반면 우리의 빨치산은 실패했을까? 어쩌면 이는 단순히 땅굴과 빨치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두 전쟁의 차이점. 무엇 때문에 그들은 통일되었고 우리는 아직까지 휴전 상태일까?
호치민 VS 사이공이윽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이 들어 보이는 가이드가 앞으로 나가 이것저것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의 군인이었다가 부상을 입어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던 그는 그의 인생역정을 통해 베트남 특히 호치민시의 현대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북부 하노이를 뛰어넘는 베트남 최고 도시였지만, 통일 이후 공산당 치하에서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터부시 되던 구 사이공. 그런 호치민에서 시클로를 끌며 하루살이로 연명하던 그가 지금의 여행사 사장이 된 것은 결국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이 시작된 이후 호치민이 옛 영광을 되찾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개혁개방 이후 베트남의 경제가 호치민을 기점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호치민이 자본주의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호치민시를 사이공이라 불렀다. 나이 든 그에게 호치민보다 사이공이 익숙한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의지 때문인 듯 했다. 사이공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자란 사이공 사람으로서 과거 적국이었던 북베트남의 일방적인 도시 개명을 어찌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공산국가 베트남의 호불호를 떠나, 호치민에 대한 존경 여부를 떠나 그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게다. 특히 그동안 사이공 사람이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보이지 않은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면 이는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괜히 사이공 사람들이 사이공 맥주를 찾고, 하노이 사람들이 하노이 맥주를 찾겠는가.
개인적으로 더욱 궁금한 것은 호치민시라는 지명의 존속여부였다. 과연 호치민시가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사이공의 그림자를 털고 영원히 호치민으로 남을 수 있을까? 물론 지금의 젊은이들이야 이 도시의 공식명칭으로 호치민을 사용하고 있지만, 소련의 레닌그라드가 다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듯이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도시명이 오래가기는 매우 어렵다. 정치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아마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북쪽의 김책시나 김정숙시 등도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구찌터널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