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유통되는 기타의 1/3을 만들어 왔으면서도 기타 한 대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 하나 없이 꽉꽉 닫아놓은 공장 안에서 쉴 새 없이 알을 까내야 하는 양계장의 닭처럼 시름시름 병들어 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계톱에 손가락을 잘리고,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유기용제를 마시며 일하다 기관지염과 천식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쁜 자개 문양을 달고 전 세계로 나가는 기타들을 볼 때면 흐뭇해하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여년 밤낮없이 기타만 만들던 사람들입니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의 노동을 통해 콜트콜텍 박영호 사장은 12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았습니다. 2006년 기준 한국부자 순위 120위입니다. 그러나 회사는 1993년 인도네시아 공장과 1999년에는 중국 공장을 설립하고는 천천히 한국 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습니다. 2007년 4월에는 인천 콜트악기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 했고, 2007년 7월에는 대전 계룡시에 있는 콜텍악기를 위장폐업하고 남아 있던 67명 전원을 정리해고 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조정에 항의해 2007년 12월 콜트악기 노동자 이동호 씨가 분신했지만, 아랑곳 않고 2008년 8월에는 인천 콜트악기마저 위장폐업하고 말았습니다. 갈 곳 잃은 이들은 문 닫힌 공장을 지키며 2년여에 걸쳐 싸우고 있습니다.
2006년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기 전까지는 아침 7시 30분까지 서로 경쟁하듯 나와 일하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2006년 노조가 만들어지고 12년 만에 가장 높게 임금인상이 되었는데 이 때 일당이 2006년 최저임금 시급보다 백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2008년에는 한 달여 동안 한강변에 있는 수십 미터 송전철탑에 올라 고공단식 농성도 해봤고, 본사점거농성을 들어갔다가 곧바로 출동한 경찰특공대들에게 진압당해 전원 경찰서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부디 공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일하며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소망이 이 이번 원정투쟁을 통해 풀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송경동 시인 /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노동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