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4.06 16:01수정 2009.04.0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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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사촌 누님께서 오셨습니다.
연옥이 누님에 대한 저의 마지막 기억은
30여년도 훨씬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머릿속에는 여전히 단정하고 여린 처녀의 모습이었지요.
세월은 그 곱던 처녀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었습니다.
외갓집은 저의 고향집과 십리 남짓한 거리에 있었지만
한때 5일장이 서던 장터거리에서 멀지않았고,
하루에 4번씩 버스가 오가던 신작로 옆 마을이었기에
어린 마음으로는 제 고향마을보다는 훨씬 도회지 같았습니다.
게다가 외갓집에는 덩치 큰 전축이 있어서
우레 같은 소리로 낯선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마을의 이장을 하고 계셔서
이런 저런 사정을 상의하기위해 마을 사람들이
외삼촌 집을 무시로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외갓집 식구들은 막중한 임무를 맡은,
외사촌들도 모두 고상하고 우아하게만 보였습니다.
저의 기억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후 저는 대처로 유학을 나왔고
여태 타관을 떠돌고 있습니다.
40여년 객지생활은 고향을 오히려 이향異鄕처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고향에 남은 친구는 하룻밤 술자리를 하고 나면
이어갈 공통의 화제가 소진되고
마을의 아이들은 모두 낯선 얼굴이 되어있습니다.
일 년에 한 두 번도 못가 보는 고향이지만
고향이 어릴 적 기억의 상태로 있어주길 바라는 욕심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댐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설마'했던 그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먼 도시의 식수를 공급하기위해
외갓집 아랫마을에 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외갓집이 있는 용촌은 수몰되고 더 두메에 있는 저의 고향마을, 앳골은
발치까지 물이 올라오지만 마을은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께 가을, 고향 선산의 벌초길에 마주한 고향 가는 길은
육중한 중장비들이 다슬기를 줍던 그 맑은 내를 엎어버렸고
산을 뭉그질러 핏빛의 황토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세 번의 강산이 변할 만한 시간의 간극을 두고 만난
누님께서는 제게 시집을 한권 내밀었습니다.
'박연옥 시집 | 삶이 예쁜 여자'
작년 가을에 발행된 누님의 시집이었습니다.
그 시집 속 70여 편의 시 속에는
제 기억속의 처녀적 누님의 모습과
불도저로 상처받기전 고향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누님의 시집속에 이미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데요'라고 말해두셨네요.
누님의 얼굴주름은 깊어졌어도 마음은 여전히 소녀라는 말씀이겠지요.
제가 그리워했던 것들이
누님의 시집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있으니
이제 점점 흐릿해지는 저의 기억을 덜 안타까워해도 될 듯싶습니다.
"먼발치에서 툭 부딪혀
또르르 굴러가는 노란 공처럼 예쁜 꽃.
-중략-
누구하나 열심히 사랑해 주지 않아도
감나무는 홀로 감꽃을 떨구고, 열매 맺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더라.
어린 날에
수도 없이 떨어진 감꽃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 만들어 걸고 다니던 꼬마의 추억을
아마 감나무도 간직하고 있겠지"
-'감꽃'에서
"단발머리 어린나이에 동네 앞에 모여서
공깃돌 받으며
옛날이야기로 해지는 줄 몰랐을 때
어떤 아이가 그랬다.
우리 동네는 옛날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서 용촌이래
용두대에 물이 왜 깊냐 하면 용이 살았었기 때문이래.
그런데 앞으로 50-100년 후면 우리 동네는 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산너머로 옮겨간대.
정말? 정말?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우리들 눈망울은 그저 먼
옛날 이야기가 신비롭기만 했어.
어떤 이가 그런 엄청난 천기누설을 하였길래
그 예언처럼 고향이 물에 잠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하나 둘 떠나고 중장비 소리만 시끄러운 고향.
-'물속으로 가라앉는 고향'에서
연옥이 누님이 이 시집에 새겨두었군요.
"동의보감에 병명도 없이 까딱없이 아플 땐
고향땅 흙을 밟는 게 특효래요"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1.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2009.04.06 16:01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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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없이 아플 땐 고향땅 흙 밟는 게 특효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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