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부용당 성안의의 묘소 (영주시 이산면 석포 1리에 있다)
김수종
그의 부친 부용당 성안의 선생은 1561년(명종16년) 경남 창녕 출신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두문동72현 중 성만용의 7대손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이 되었다.
퇴계의 수제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퇴계의 아들과 사돈이었던 영주출신의 경상우도 관찰사 백암 김륵 선생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백암 선생은 당시 홀아비였던 성안의의 학문의 깊이와 사람 됨됨이를 믿고 자신의 종손녀와의 혼인을 주선한다. 성안의는 재혼 직후 부모, 형제 전부를 고향 창녕에서 처가인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로 피난시켰다.
그가 가족 모두를 고향 창녕에서 영주로 이주시킨 이유는 창녕이 전쟁의 피해가 컸던 이유도 있었지만, '영주 최고의 명문가인 선성김씨 처가에서 많은 토지와 재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계서당 종가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후 창녕으로 돌아가 1,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으며, 곽재우와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5년 아들 성이성이 출생했고 형조좌랑, 예조, 병조좌랑을 거쳤다.
전쟁 후 영해부사, 남원부사에 제수되어 3년을 재직하고(이 때 성이성의 나이 13-16세로 춘향전과 연관된다.) 광주목사로 승진하였으나 얼마 후 영주로 돌아가 10여 년 간 후학을 가르쳤다. 1614년에는 처가 인근에 있는 이산서원 원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봉화의 계서당이 1613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이 시기 정도까지는 처가나 처가 인근인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신암리 지역에서 터를 잡고 성안의 일가가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아들 성의성은 결혼 후 분가하여 봉화군 물야로 가고, 부친 성안의는 영주시 이산면에 계속 살았던 것 같다. 영주시 이산면에서 봉화군 물야면까지는 대략 40~50리 길로 집을 두 채 정도 소유하지 않고는 왔다갔다하면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