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아인슈타인과 허블의 절망과 성취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33] '화첩을 보며'

등록 2009.04.15 09:53수정 2009.04.1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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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두오의 소리는 송아지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이두오의 등에 비누를 문질렀다. 비누는 현무암처럼 검고 거친 세탁용이었지만 인공향이나 화학 성분은 전혀 없었다. 이두오의 등에 물을 부어 헹군 조수현은 그가 몸을 닦는 동안 두레박 물을 자기 발에 쏟아 부었다. 말할 수 없이 차갑고 개운했다. 튄 물방울이 몇 개 그녀의 얼굴에 맺혀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을 하늘로 젖혔다.

몸을 다 닦은 이두오가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이번에는 수현씨가 엎드려 볼래요?"

조수현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별이 하나 둘씩 돋기 시작했다. 그녀는 움막 앞 마른 여물통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관측은 안 하고 방에 틀어박혀 하는 계산만으로 천체 연구가 되나요?"
"관측은 수현씨가 오면 함께 하려고 했지요."

"함께 관측하면서 별 이야기든 우주 이야기든 들려주실래요?"


이두오는 움막 안으로 들어가 노트를 꺼내 왔다. 그는 노트의 몇 장을 빨리 넘기며 대충 읽어 보았다.

"어두운데 글씨가 보이세요?"
"수현 씨에게 들려 줄 이야기를 메모한 겁니다. 안 보이지만 다시 들쳐보는 것만으로 기억이 재생됩니다."


조수현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이두오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사실 우주를 본격 연구하는 데 육안 관찰은 의미가 없습니다. 대기권의 기체들과 태양계의 행성들이 먼 별들을 가리기 때문이지요."

조수현은 통일이 된다면, 그리고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이두오에게 천문대는 못 하더라도 망원경이라도 하나 장만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금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금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는 아인슈타인이고 금세기 최고의 천문학자는 허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과 허블은 어느 면에서 대조적인 학자들입니다. 1931년 아인슈타인은 윌슨산을 방문해 허블과 역사적인 대면을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 자리에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방문 길에는 아인슈타인의 부인이 동행했는데, 허블은 아인슈타인 부인에게 천문대의 이곳저곳을 안내하면서 거대한 천체망원경이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를 밝혀 줄 것이라고 조금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제 남편은 편지봉투 뒷면 같은 데에 수식을 끼적이면서 그 일들을 해왔답니다."

조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두오가 왜 책상에 앉아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가의 상상에 힙 입어 물리학자들이 직관으로 가설을 세운 후, 수학자의 도움을 받아 계산하면, 천문학자들이 관측하여 증명하는 것이 현대 우주학의 추세입니다. 우리도 묘향산이나 개마고원쯤에 윌슨산천문대 같은 것을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해 보다가 그만 둔 적이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부질없는 생각이겠지요?"

"터무니없긴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생각이네요."

"뉴턴 이후 250년 만에 과학이 도약할 수 있었던 첨단에는 아인슈타인이라는 걸출한 천재가 있습니다. 그는 현대과학의 혁명가답지 않게 아주 엉뚱한 장소에 있었습니다. 그는 스위스에서 대학을 마친 후, 취직자리를 얻지 못해 상심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자존심 강한 아인슈타인을 곱게 보지 않은 지도교수가 추천서를 써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교수의 강의가 신통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수업을 빼먹는 일이 잦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실패자로 간주했습니다. 당시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 부모는 나 때문에 거의 행복한 적이 없었어. 내 학비를 대기 위해 그 분들은 모진 고생을 하셔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지금도 무위도식하면서 그들에게 짐만 되고 있을 뿐이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아인슈타인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기에 그는 자살까지 생각했겠습니까? 전공인 물리학으로는 취직이 어렵겠다고 판단한 아인슈타인은 보험회사를 첫 직장으로 택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이 너무 적어 어린이들의 공부를 가르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직장 상사와 말다툼을 벌인 끝에 그는 해고되었습니다. 와중에 여자 친구가 임신까지 했습니다. 그는 태어날 자기 아기가 사생아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깊이 절망했습니다. 그때 태어난 아인슈타인의 딸에 대해서는 지금 아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책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 아들이 인생의 낙오자라는 확신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학교 친구가 그를 스위스 베른에 있는 특허청에 자리를 알선하면서부터 아인슈타인의 얼룩진 절망은 때를 벗기 시작합니다.

금세기 최고의 천문학자 허블

다음으로는 현대 천문학의 원조 에드윈 허블 이야깁니다. 그를 20세기 최고의 천문학자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문학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허블을 증오하는 사람일 겁니다.

미국 미주리의 오지에서 태어난 그는 수줍음과 야망이 동시에 많은 소년으로 자라났습니다. 변호사인 그의 부친은 아들을 자기처럼 변호사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소년 허블은 쥘 베른의 소설과 별의 매력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는 <해저 2만 리>와 <지구에서 달까지> 등의 공상과학소설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완강하고 권위적인 허블의 아버지는 아들을 압박하여 법학을 전공하게 하고 옥스퍼드대에 진학시켜 로즈장학금을 받도록 했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에 진학하는 일은 상류사회로 나아가는 기회이자 자랑거리였습니다. 여기에 허블도 녹아 버렸습니다.

그는 영국 상류사회의 속물주의와 매너리즘에 영혼을 담갔습니다. 그는 정장을 하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으며, 강한 영국식 억양으로 결투에서 얻은 상처를 숙녀들에게 자랑하며 내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상처는 허블이 자해로 입힌 것이었습니다."

조수현은 카악 웃음을 터뜨렸다. 이두오는 조수현이 왜 웃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머리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웃는 도중 고개를 한 번 든 그녀는 이두오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말했다.

나는 국가가 싫습니다

"아인슈타인이나 허블에게도 아름답지 않은 세월이 있었던 것입니다. 돈과 명예 때문에 천재들의 삶이 한동안 일그러져 있었지요. 아인슈타인과 허블은 그 후에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과감하게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실에서 수식을 끼적여야 하고 허블은 천문대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아야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끝내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대성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아인슈타인이건 허블이건 모두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나 허블의 불우했던 그 시절보다 더 아름답지 못합니다. 당장 수현씨만 해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군인입니다. 대관절 국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나 명예는 실체라도 있지, 국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탐욕이 위장된 허상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국가가 싫습니다. 국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아름답지 않은 일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를 참조한 내용입니다


덧붙이는 글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를 참조한 내용입니다
#아인슈타인 #허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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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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