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세라프김영훈 사장이 한국세라프가 생산한 증정용 주방용품 세트를 설명하고 있다.
김갑봉
프레스로 강하게 찍어내는 소리와 날을 세우느라 그라인더에 갈리는 쇳소리로 공장이 요란하다. 한쪽에선 연신 철판을 찍어내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찍어낸 철을 깎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선 날을 세우느라 정신없다. 손잡이를 생산하는 사출기도 바쁘게 돌아간다.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 한국세라프(사장 김영훈·42)는 대를 이어 40년 넘게 칼과 가위, 채칼 등 주방용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다.
김영훈 사장의 선친인 김규현 선생이 창업(삼랑가위)했던 6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40년 넘게 가위를 생산하고 있는 업체로, 지금은 가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방용품을 생산하고 있다.
김 사장은 선친이 작고한 98년부터 일을 도맡아 오고 있다. 그는 "60년대 초로 기억되지만 아버지가 정확하게 언제 창업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어릴 때부터 가위와 친하게 지냈고, 손이 빨라 포장하는 일부터 배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세라프의 모태인 삼랑가위를 창업한 김규현 선생은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 전남 장흥에서 서울 왕십리로 올라온다. 올라와서 선생이 시작한 일이 창업 동기가 됐다.
김 사장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참빗이나 가위를 들고 방문판매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때는 이 동네 저 동네 돌며 칼 갈아주는 사람도 있을 때였다"며 "아버지도 처음에는 가위를 들고 방문판매를 하다가 가위에 흥미를 느껴 직접 제조를 시작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장간에서 가위나 칼을 만들 던 때라 김규현 선생은 이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주물가위를 생산하는 삼랑가위를 창업한다. 주물가위란 쇳물을 금형 틀에 부어 만든 가위다.
그렇게 만든 삼랑가위는 당시 제법 알아주는 가위였다. 산업화와 더불어 공작기계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삼랑가위 역시 주물제조 방식이 아닌 프레스와 사출을 이용한 가위를 90년대 초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김규현 선생은 삼랑가위를 89년 부평으로 이전했고, 김 사장은 군 전역 후 91년부터 아버지로부터 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자가 한참 사업을 펼치고 있을 때 돌연 김규현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 사장은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 그때를 평생 잊을 수 없다는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버진 가위 날을 세우기 위해 프레스에서 나온 쇠붙이를 깎고 계셨다. 근데 갑자기 쇠붙이 파편이 아버지 가슴으로 날아드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며 "아버지께서 갑자기 피를 흘리며 쓰러지셨는데… 그 후로 못 일어나셨다"고 말했다.
98년 불의의 사고로 김규현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김 사장은 불과 서른하나의 나이에 회사를 책임져야 했다. 김규현 선생은 아들이자 동반자였던 김 사장에게 평생 잊지 못할 유훈을 남겼다. 그 유훈은 오늘날 한국세라프의 정신으로 남아있다.
김 사장은 "아버지는 부도도 많이 맞고 사기도 많이 당했으면서 제게 신신당부했던 것은 절대 남에게 손해 입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좀 더 손해를 본다 생각하고 일하라며 그게 결국 너를 위한 일이라고 늘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유훈을 가슴에 새기고 회사를 꾸려갔지만 쉬운 게 아니었다. 중간에 몇 번 포기할까도 생각했던 김 사장은 그 때마다 아버지가 남긴 유훈을 생각하며 악착 같이 일어섰다. 그의 잘린 세손가락은 그가 걸어온 길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 사장은 "아내가 미친놈이라고 했다. 손가락이 잘렸을 때도 그랬고, 잘려 나갔는데도 가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공장 짓는다면서 살던 집 처분하고 사글세 지하방으로 갈 때도 또 미친놈이라고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