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했다. 분향소는 철수했을 거라 생각하며 도착한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아직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억하며 자리를 잡은 천막과 작은 분향소가 있었다. 게다가 맨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길 건너편 서울 광장에서 잔디밭에 앉아 편하게 엉덩이를 딛고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대한문 앞 딱딱한 바닥에 종이 한 장 깔고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 분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여럿이 무리지어 앉은 여학생들. 그 사이에서 나는 쑥스러운 몸짓으로 대화할 대상도 찾지 못한 채 혼자 앉아 강의 시작을 기다렸다. 대한문에서 길거리 강연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직접 보러 온건 처음이었다.
인권실천시민연대와 언론개혁시민연대가 공동으로 준비한 대한문 길거리 특강은 촛불 문화제와 함께 진행된 관계로, 인터넷에 올린 공지 시각보다 30분 이른 저녁 7시경에 시작됐다. 들뜬 마음에 6시 30분에 도착한 것이 다행이었다. 강의를 위한 책상과 각종 음향기기를 설치한 후, 이날(6일)의 강연자인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이 마이크를 들고 '권력과 자본의 언론 장악문제'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나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조금씩 강의에 집중했다.
미디어법 진실을 말하다
이날 강의는 정부가 추진하는 미디어법과 관련해 대기업과 신문자본이 결합해 거대한 신문 방송 재벌이 만들어질 경우 일어날 폐해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자리였다. 주제가 무거워서 강의 내용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이 크게 어렵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강의 내내 전문 용어 하나 나오지 않았고, 공부 많이 했다는 먹물들이 흔히 저지르는 형이상학적 단어의 남발도 없었다.
최 위원장은 대부분의 선진국이 신문 방송 겸용을 허용하는데 한국만 그것을 막고 있다고 말하는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미국의 경우 한 지역에서 방송사를 겸용하는 기업은 다른 지역에서는 방송사를 운영할 수 없다고 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같은 논조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보면 여론이 획일화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한 지역에서만 방송을 겸용할 수 있도록 규제한다는 말이었다. 한나라당 의원 중에서는 100명 정도는 이 상황을 잘 모르고, 그저 법안을 입안한 몇몇 의원만이 진실을 알 뿐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론 독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언론악법 통과시키지 못하도록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한나라당이 미디어법 개정을 '경제살리기 법안'이라고 변명한 것을 강연자는 새빨간 거짓말이라 일축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자본들이 지역방송이나 작은 신문사에 자본이 들어가면 일자리는 줄어든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이지만, 대기업들은 나날이 커지고 중소기업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는 현실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조중동 등의 중앙 언론은 신문 하나를 파는 데 여러 경품을 끼워 팔아 시민들의 구독률을 높이면 그 사이에서 작은 신문사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됐다고 최 의원장은 강조했다.
최 위원장이 지적한 한국의 정말 부끄러운 지표 한 가지. 상위 3개 신문사가 전체 신문사의 7~80%를 차지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는 통계다. 더욱이 그 3개 신문사가 꼴보수(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문사로 같은 논조의 기사를 쓴다는 사실을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반칙과 편법을 동원해 시장을 장악하는 신문들이 방송을 장악하도록 허락해야 하겠습니까?" 라는 강의자의 물음에 사람들은'아니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 의원장은 정부와 여당이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언론악법을 강제로 추진하는 것은 이 법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 살리기나 여론을 다양하게 하기 위한 법안이 아닌 정치 의도가 실린 법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날 강의를 정리했다. 이에 동감한 시민들의 말에 큰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강의가 끝나고 6월 10일 촛불을 들고 모이자는 피켓이 사람들 위에 세워졌고, 사람들이 촛불을 키고 함께하는 문화제가 열려 각종 공연과 함께 대학생, 용산 참사 피해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잘못된 정치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스스럼 없이 의견을 공유하는 장소
언론 관련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인터넷이나 관련 책을 통해 알던 지식이 마이크를 통해 광화문 거리에 울려퍼졌다. 비록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게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시민 강좌나 지식층을 위한 특정 세미나에서가 아닌,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열리는 강의 풍경은 진귀하고도 놀라웠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접근하는 것에 익숙한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별 친분이 없는 나이 드신 분들도 강의 내용을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빨갱이라 말하고 젊은이들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해서 철이 없는 거라면서 이명박을 지지하는 어른들을 만난 경험이 있는(해병 전우회나 정기총회나 지하철에서 종종 만나 뵐 수 있었다) 내게는 그 모습이 무척 신선했다. 대한문 앞은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가진 사람, 덜 가진 사람 모두가 한 나라의 인권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마련한 대화의 장. 좀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고 이 사회를 올바로 바로잡기 위해 지켜야 할 상식을 외치는 시작이 되길 빈다.
강의는 1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란다. 인터넷에는 저녁 7시 30분 시작이라고 공지했지만 저녁7시까지 가야 강의 시작부터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 준비물은 약 한 시간 이상 딱딱한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어야 하니 일반 종이보다는 어머니들이 목욕탕에 갈 때 앉으려고 갖고 다니는 폭신한 스티로폼을 들고 가기 바란다. 그 외 준비물은 필기구 또는, 사회에 대한 호기심 정도? 내가 들은 강의에서는 아무도 질문하는 이가 없었는데, 다음 강의 듣는 사람들은 혹여 궁금한 점 있으면 질문을 몇 가지 하면 좋을 것 같다.
행사 진행했던 사회자 말대로 당장 이 강의를 통해 해결책을 얻을 수는 없지만 새로운 지식을 얻고, 생각하고, 의문이 생기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가는 시민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길거리 강의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언론이나 정부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게 아니라 한번쯤은 의심을 하고 반문할 수 있게 되기를, 일단 나 자신부터 그런 일들을 실천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자리였다.
2009.06.08 17:50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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