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하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통한 서거로 시국은 급작스런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충격과 슬픔, 분노가 혼합된 통분으로 격앙되어 있습니다. 현 정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일한 자세로 일관하며 '대중들의 잊어버리는 능력은 엄청나다'는 오만한 착각 속에 국민들의 눈치를 보며 시간이 빨리 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국민들은 각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슴 깊이 반성하며 새롭게 깨닫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이 집권한 후 채 1년 반도 안 된 지금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자행한 반민주적 작태를 이제 더 이상 가만 두고는 못 보겠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정권을 내어주니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참담하게 망가질 수 있냐"며 통탄하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때 맞춰 보다 못한 사회 각계각층의 원로와 교수, 시민단체, 학생들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는 시국선언을 통해 현 정권에게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동안 수많은 민주시민들의 숭고한 투쟁과 희생으로 비로소 얻어지기 시작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현 정권을 향해 강력한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문득 황석영 선생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그립기까지 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 진보적 발전을 위해 거침없는 말로, 고뇌에 찬 글로, 실천적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었던 선생의 강단 있는 모습이 그립습니다. 누구보다도 사회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선도적으로 실행하려 했던 치열한 고뇌와 투철한 작가의식을 가진 당신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기억해 봅니다. 지난 5월 13일이었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꼭 열흘 전입니다. 선생은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참여하여 동행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정부'로 평가했습니다. 국정운영에 협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광주사태'로, 서구에서도 흔히 있었던 그만그만한 '사태'쯤으로 규정하듯 표현했습니다.
당시 선생이 MB의 전용 비행기 안에서 보여준 이해하기 힘든 발언은 수많은 사람들을 일파만파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 충격은 이 나라의 민주적 진보세력과 개혁적 시민들에게 커다란 혼란과 상실감, 패배감, 배신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허탈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선생께서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에 따른 상처도 컸습니다. 선생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실망과 상처도 그 만큼 크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얼마 후 선생 스스로도 본 뜻이 잘못 전달되었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의 실수였다고 해명하기도 했었지만 말입니다. 현 정권에 의해 민주주의가 사정없이 훼절되고, 통일의 기운이 무참하게 말살되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보통의 상식을 가진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느꼈던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습니다.
선생은 민주주의가 역주행하고 있는 이 위기의 시대, 불도저식 일방주의 독재시대에 진보진영의 사람들에게 큰 산처럼, 큰 바위처럼 굳센 모습으로 올곧게 신념을 지키는 '지식인 투사'로 자리를 지켜주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안타깝고, 실망스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올바로 전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선생께서도 스스로 인정했듯이 사려 깊지 못했고,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오이 밭에 가서 신발 끈을 매지 말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뜻을 간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선생에 대해 믿고, 의지하며, 기대했던 많은 것들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평생을 걸쳐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이 어쩌면 도매금으로 매도되고, 비이성적으로 부정당하는 아찔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변절, 배신, 소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일부 사람들의 입을 타고 회자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깊숙하게 마음이 아파 참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황석영 선생님,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오십시오. 당신 평생의 이념과 사상, 문학과 실천의 가치롭던 행위와 체험이 오롯이 녹아 있는 삶과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운 선배, 후배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는 민주주의 진보의 광장으로 제발 돌아오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에 기고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때 마침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하여 수많은 국민들이 애도하고, 분노하며, 이명박 정권이 저지른 집권 1년 반 동안의 소통 없는 불도저 독재주의를 규탄하고 있는 시점에 밝힌 것이어서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에 밝혔듯 분단된 남북관계를 변화시키고자 한 선생의 솔직한 생각, 그 간의 번민했던 나날과 심정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밝히는 시의 적절한 의사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신문 기고에서 "이명박 정권 들어 남북평화 실낱 희망도 사라진 것 같다"라고 적으신 글을 읽으며, 과거 외롭게 분단을 넘어 북행을 결행했던 선생 본연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언급하신 대로 현 정부는 촛불시위 이후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정책을 '잃어버린 10년'의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행하고 있다는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회 전반에 우편향이 가속화되면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었다는 인식에도 물론 그렇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징적인 죽음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으며, 남북은 전쟁 직전 상태로 진입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자기반성과 변화가 없이는 현 정권의 모든 정치적 가능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선생의 지적에 아무런 이의 없는 찬동을 보냅니다.
황석영 선생님, 툴툴 털고 제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얼마 전에 있었던 당신의 과오와 실수, 나를 포함한 다른 모든 이들의 오해와 불신, 비난을 잊으십시다. 서로 겸허하게 고백하고, 사과하며 찌그러진 술잔에 든 걸쭉한 탁주 한 잔 속 시원히 목구멍에 털어 넣으십시다. 그리고 다시 어깨동무 하여 노래합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2009.06.08 21:24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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