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선덕여왕>.
MBC
<자명고>와 <천추태후>에 이어 <선덕여왕>까지 합세함으로써 방송 3사의 사극은 여성 주인공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전의 고구려·발해 시대(주몽·연개소문·대조영)와 작년의 조선시대(왕과나·이산·대왕세종)를 거쳐, 금년에는 마치 약속이나 된 듯이 특정 시대가 아닌 특정 주제(여성)가 방송 사극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5월 25일부터 방송되어 주목을 끌고 있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을 시청하다 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에 관한 지식에 접하게 된다.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년)과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쌍둥이 중의 둘째로 태어난 드라마 속의 선덕여왕(이요원분)은, 정적인 미실(고현정분)이 '어출쌍생, 성골남진'(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다)의 예언을 활용할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 진평왕의 명령에 의해 시녀인 소화(서영희분)의 품에 안겨 중국 서북쪽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사막에서 소화와 함께 주점을 경영한 드라마 속의 덕만(어린 시절의 선덕여왕)은 그곳에서 장사 수완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계림어(신라어) 외에 중국어·로마어까지 구사하고 그리스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까지 읽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로마 상인들과 친한 드라마 속의 덕만은 마음속으로 로마를 동경하는 꿈 많은 소녀이기도 하다.
드라마 속의 덕만은,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도 모른 채 소화를 친어머니로 알고 살다가 15년간 자신들을 추적해온 미실의 부하 칠숙의 등장으로 인해 '최근에야' 비로소 출생의 비밀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드라마는, 사막에서 선머슴처럼 자란 덕만이 양어머니인 소화를 잃은 채로 계림(신라)으로 돌아와 왕위에 등극하는 과정을 그리게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속 선덕여왕은그럼, 픽션임이 분명한 사막에서의 성장과정이나 외국어능력 등은 제외하고 드라마에 묘사된 선덕여왕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과연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그는 정말로 진평왕의 차녀로서 왕위를 계승했을까? 여기서는 선덕여왕이 장녀였는지 차녀였는지 하는 점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국한시키기로 한다. 먼저, 기존에 인정된 사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이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 "선덕왕이 즉위하니 휘(이름)는 덕만이고, 진평왕의 장녀다. 어머니는 김씨이며 마야부인이다. 덕만의 성품은 관대하고 명민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국인(國人)들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 "제27대 선덕여왕. 이름은 덕만. 아버지는 진평왕,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 성골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
위의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장녀였다고 알려주고 있고, 이보다 늦게 나온 <삼국유사>에서는 특별한 반대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 않다. 이처럼 기존에 알려진 사료들을 기초로 하면,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장녀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선덕여왕을 진평왕의 차녀로 그리고 있을까? 드라마 <선덕여왕>이 근거로 삼고 있는 자료로는 위의 두 책 외에도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를 들 수 있다. 덕만공주에게 천명공주라는 언니가 있었고 그 천명공주가 진평왕의 장녀라는 드라마의 내용은 바로 <화랑세기>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화랑세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작정 신뢰를 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진위논쟁이 현재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1989년에 32쪽짜리 <화랑세기> 초록본 일부가 공개된 데에 이어 1995년에 162쪽짜리 <화랑세기> 필사본이 추가로 공개된 이후로 이것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사 학계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아직 이 논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진위 여부로 논란을 빚고 있는 <화랑세기>현재까지는 다수설이라 할 수 있는 <화랑세기> 위작설 쪽에서는 ▲<삼국사기>와 전혀 다른 <화랑세기>의 성관계(근친혼·동성애·다부제多夫制 등)는 후세 사람들이 신라를 헐뜯기 위해 악의적으로 위작한 결과일 것이다 ▲<화랑세기>가 일본 사료와 유사한 점을 볼 때에 일본인에 의해 위작되었을 수 있다 ▲<화랑세기>의 구성에 나타난 사회학적인 유형 분류가 상당히 근대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그런 사고를 가진 누군가에 의해 위작되었을 수 있다 등등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위논쟁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라는 책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이 책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권46 설총열전에는 "김대문은 본래 신라 귀족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고 전기(傳記) 약간을 지었으며, 그의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볼 때, 신라인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지었고 김부식(1075~1151년) 시대에도 그 책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진위논쟁은 <화랑세기> 자체에 대한 게 아니라 초록본이나 필사본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현재의 초록본이나 필사본이 김대문의 원본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신라의 사회상에 관한 한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보다는 신라인인 김대문의 기록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위논쟁이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으므로, 현재 나와 있는 <화랑세기>에 대한 우리의 '불신'과 '믿음'은 모두 다 유보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진위논쟁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 채, 드라마 <선덕여왕>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범위에서만 <화랑세기>의 내용을 인용하기로 한다.
<화랑세기>선 진평왕 차녀로 돼 있는 선덕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