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새마을중학교 졸업사진. 누나(두 번째 줄 우측에서 두 번째)는 가족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봉제공장 시다가 되었다.
조호진
둘째 누나 구영미(47·이하 누나)씨가 고향인 전남 강진을 떠나 서울로 돈 벌러 간 것은 1978년. 새마을 재건중학교를 마친 누나는 동네 사람이 청계천 광장시장에서 운영하는 봉제공장의 시다로 취직했다. 누나도 공부하고 싶었다. 비바람 겨우 가려주는 천막 교실에서 어렵사리 공부하던 누나라고 여고생의 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가난한 살림살이에다 동생 셋의 앞가림까지 생각하면 공부는 넘볼 수 없었다.
열여덟 시다의 꿈은 미싱사였다. 미싱을 타면서 능수능란하게 옷을 짓는 미싱사, 시다를 이리저리 호령하며 혼내기도 하는 미싱사는 하늘의 별처럼 높아보였지만 무엇보다 미싱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시다보다 몇 배는 돈을 잘 벌었기 때문이다. 어서 돈 벌어서 동생들 학비도 보내주고, 아버지에게 소도 사주고 싶었던 누나는 미싱사가 되기 위해 뼈 빠지게 일했다.
누나는 봉제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는데 일감이 밀려드는 명절 무렵이 되면 야간잔업 철야를 일삼아야 했다. 미싱을 타고 싶었던 누나! 누나는 미싱사의 숙련된 기술을 곁눈으로 익히고 또, 미싱 보조에 오르기 위해 미싱사 언니의 심부름도 곧 잘했지만 눈물을 쑥 뺄 정도로 구박 받는 날도 숱했다.
객지 밥은 눈물 밥이었다. 부모님도 동생도 보고 잡았다. 천막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을까. 서글픈 마음에 싱숭생숭 하다가도 집안을 도와야 할 처지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싱사 언니의 비위를 맞추고, 물건을 옮기고, 심부름을 하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해가 뜨고 지고, 잔업에 졸다가 깨다가 그렇게 시다생활 1년이 되면서 적금통장이 만기가 됐다.
'아버지 20만원 부쳤으니 소 한 마리 사세요!'누나는 시다로 일하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부은 적금 20만 원을 찾아서 아버지께 부쳤다. 서울에 돈 벌러 오면서 다짐한 첫 번째 소원은 아버지에게 소를 사드리는 것, 소 한 마리를 사드리는 것은 가난한 살림밑천 장만해 드리는 것 이상의 사무친 사연이 있었다.
아버지(78)가 초등학교 5학년인 누나에게 소를 매고 학교에 가라고 하자, 지각생 소리를 듣기 싫었던 누나는 바삐 소를 몰다가 그만 구덩이에 빠뜨리면서 소의 다리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소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은 살림 한 밑천을 무너뜨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5만 원에 산 송아지를 중간 소로 키웠지만 노동력을 상실하면서 쓸모없어진 소는 우시장에서 3만 원에 팔렸다. 누나는 하늘이 노래졌다. 근심에 젖은 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 죄스럽고 사무쳤던 것이다.
동생의 명문대 진학은 누나의 꿈... 못 배운 한 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