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6.21 13:41수정 2009.06.21 13:41
<놀멍 쉬멍 걸으명 제주 걷기 여행>
서명숙 지음, 북하우스, 2009
한국은 지금, '걷기 열풍'이다. 지리산둘레길, 제주올레, 강화도길 등 걷는 길은 생기는 족족 대박이다. 길이 열림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수만의 군사 아니 도보꾼들이 너나없이 몰려든다. 서점의 여행 코너는 또 어떤가. '걷기' 혹은 '걷는'의 제목을 단 여행서가 수십 종이 넘는다. 우리가 이토록 걷기에 목말라 했던가, 의아할 정도다.
걷는 여행을 얘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대표선수가 바로 제주올레. 한국의 No.1 도보여행코스이자 전 국민에 걷는 여행 열풍과 제주도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 2007년 9월 제1코스 개장을 시작으로 현재는 12코스에 이르는, 제주 남부 해안을 몽땅 둘러싼 아름다운 도보길. 여기서 잠깐! 응삼이도 수남이도 다 아는, 근데 용식이만 모르는 상식 하나. 올레는 제주어로 '집으로 통하는 아주 작은 골목길'을 의미한다고. 그러니까, 제주도 곳곳에 감춰지고 막혀있던 작은 골목길들을 연결, 제주도 곳곳을 둘러볼 수 있고 그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길이 바로 제주올레인 것이다. (제주올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공식홈페이지 http://www.jejuolle.org/ 참고)
"정말, 이 코스, 죽음이네, 죽음!"이라는 한 참가자의 말에 나는 거드름을 피웠다. "죽을 곳이 또 있으니 여기선 죽으면 안 돼요." 송악산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중략) 송악은 발치에 엎드린 제주 바당을 시시각각 다른 넓이와 각도로 눈앞에 펼쳐냈다. 바다 풍경은 교향악처럼 풍부하고 다채로웠고 현란했다. 오름 정상의 시비에 적힌 '(이곳에서는) 해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어부들의 고기 잡는 소리가 들린다'는 시구는 옛사람의 과장이 아니었다. 풍경은 아득하고 소리는 가까웠다.
<놀멍 쉬멍 걸으명 제주 걷기 여행>은 바로 이 제주올레를 만든 서명숙씨의 책이다. 제주와 제주올레 이야기가 담긴. 책 속의 글들은 총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주올레가 만들어진 과정, 서명숙씨가 걷는 여행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사연, 제주올레의 발단이 된 그녀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 도보여행기, 제주올레 위에 선 올레꾼들 이야기, 그녀가 추억하는 제주 그리고 제주 사람들 이야기, 이렇게 다섯 가지로 말이다.
책 전체를 통틀어 버릴 글 하나 없는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부분은, 제주올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저자가 동생과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이야기였다. 초반에 등장한 이 이야기가, 어쩌면 앞으로 올레길이 상징하는 그 의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다.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동생인지라 제주에 내려가더라도 가까이할 생각이 아니었다. 동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기에. (중략) 가는 길이 달라 '불가근 불가원'으로 지내던 동생은 어느덧 답사의 동행자가 되었고, 제주 길 위에서 나는 동생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중략) 동생에 대한 두터운 미움은 시나브로 엷어졌다. 우리는 뜨거운 여름날 올레를 탐사하면서 어느덧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날의 사이좋은 오누이로 돌아갔다. (중략) 올레 길은 열리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깊은 상처를 아물게 했다.
책의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제주 사람들 이야기도 쉽게 잊히지 않는 이야기. '신들린 춤꾼 경숙 언니'나 '날품 팔아 시 쓰는 유순 언니', '스킨스쿠버계의 최고수, 허창학 오라방'은 슬쩍 가슴 저미는 이야기의 주인공들. 제주 출신의 글쟁이가 자신의 추억과 현재를 더듬으며 풀어놓는 제주 사람들의 삶은 호기심을 넘어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5년여 만에 창학 오라방은 결국 동지의 시신을 화순동굴에서 발견했다. (중략) 간신히 배 위로 올라가서 시신을 살펴보니 잠수복에 갇혀 있던 몸뚱아리는 온전한데 정작 머리가 없었다. 세 시간 후, 다섯 시간 후, 두 차례나 더 시도했지만 인양에 실패했다. 다음날 플래시까지 동원해서 끝내 머리와 산소탱크와 총까지 죄다 찾았다. 시신을 라면상자에 곱게 수습해서 그의 고향인 경기도 여주로 데려가 장사를 치르고 난 뒤에야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혀온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더란다.
제주 여행만 네 번. 고교시절 수학여행으로, 대학 때 답사로, 가족 여행으로, 그리고 친구와 놀러. 갈 때마다 매번 다른 사람들과 한 여행이었지만, 코스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늘 제주는 딱 2박 3일치 여행코스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오홀, 서명숙씨의 책을 읽고 난 뒤 생각이 '완전' 달라졌다. 렌트카 혹은 관광버스로 찍어대는 관광지말고, 꼬불꼬불한 올레길을 느릿느릿 걷고 싶어졌다. 뜨내기장사에 야박해질 대로 야박해진 가게들 말고 제주 서민들에 내주듯 소박한 갈치국 한 대접 내는 작은 식당에서 밥 한 그릇 먹고 싶어졌다. 이번엔 2박 3일이 아니라 한 달이다. 야무진 다짐도 해본다. 그리고 제주로 떠나기 전, 꼭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야겠다.
2009.06.21 13:41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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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걷기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북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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