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창호지문이 환했다. 홑이불을 들추고 일어나려는데 아랫도리가 척척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것이 내 소행인지 아닌지를 추리해보았다. 다른 아이들과 견주어 이불에 오줌 싸는 버릇을 비교적 일찍 졸업했기 때문에, 방바닥을 습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 자신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타구니 쪽이 젖어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손을 뻗어 짚어보니 동생 선길이 녀석은 엉덩이 쪽만 젖어 있었다. 그렇다면 내 오줌이 흘러간 게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길이 녀석이 아이들에게 소문을 낸다면 영락없이 오줌싸개로 놀림감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아직 자고 있는 선길이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아버지 어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토방마루 한 켠 밥상에 나와 선길이의 아침밥이 차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는 막내 선유를 업고서 일찍부터 큰집에 일을 해주러 간 모양이었다. 큰집의 큰어머니는 바느질이며 다리미질을 비롯한 온갖 집안일들을 손아래 동서들을 불러서 해결했기 때문에, 또 한 명의 큰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큰집으로 불려 다녔다.
'아, 맞어, 비행기!'
나는 축축한 아랫도리를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남새밭 쪽으로 내달았다. 우리 남새밭 바로 위에는 광희네 밭이 있었는데 어젯밤에 그 밭으로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내려앉았다. 그 화물기는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고무신처럼 생겨먹어서 우리는 그것을 '신짝비행기'라 불렀다. 정말로 고무신처럼 생겼는지,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으로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천만이었다.
'분멩히 우리 집 뽀짝 옆, 남새밭으로 내려 앙젔는디…'
우리 밭은 물론이고 광희네 밭 어디에도 비행기가 내린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라먼 내가 꿈을 꾼 것이라, 그 말이여?'
맥이 빠졌다. 생각해보니 고 녀석이 내려앉으면서 내질러댄 굉음에 놀라 꿈속에서 오줌을 싸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따라 남새밭에 새로 피어난 호박꽃들이 유난히 많았다. 나는 수꽃 한 송이를 잡히는 대로 따 들고 꽃잎을 북북 뜯어낸 다음 노란색 고추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고놈을 가지고서 여기저기 암꽃의 꽃술을 헤집고 다니며 노란 가루를 발라댔다. 그렇게 해야 호박이 제대로 자란다 했다. 본시 그 일은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내 몫이었다.
'이상한데?'
평소 같으면 해가 수평선에서 한 뼘 반 쯤 떠올랐을 때 학교에 가면 되었는데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했기 때문에 도무지 시각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물 두어 바가지를 퍼서 후다닥 아랫도리를 씻고서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아마도 그놈의 신짝 비행기 꿈 때문에 늦잠을 자버린 성싶었다. 나는 밥 한 숟갈을 떠서 입에 문채로 책보를 허리에 매고 토방마루를 내려섰다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야, 선길아, 나 학교 갔다 올 것잉께, 일어나서 밥 묵어라 이."
나는 그렇게 얘기하고 나오려다 말고 주춤거렸다. 무엇인가 모자란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 단잠의 끄나풀을 놓지 않으려고 홑이불을 감은 채 몸을 뒤채는 녀석의 엉덩짝을 철석 한 대 내갈겼다. 그러고는 선길이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야, 이 오줌싸개 새끼야, 너가 오줌을 싼 바람에 내가 시방 지각을 하게 셍게부렀어. 엄니 오기 전에 언능 일어나서 걸레 뽈아다가 방바닥 닦으랑께!"
그제서야 선길이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손바닥으로 제 엉덩짝을 만져보고 나서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할 말을 다 했으므로 후다닥 사립을 뛰쳐나갔다. 그러면서 선길이한테 조금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을 하는 놈은 아조 나쁜 놈이여."
아버지가 틈만 나면 나에게 하는 말이었고,
"내가 책임 맡아서 해야 될 일을 남에게 미루는 학생은 아주 나쁜 어린이야."
언젠가 청소당번의 임무를 팽개치고 도망쳤던 아이들을 다음 날 아침에 불러 세우고서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면서 여자 담임선생님은 또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줌을 쌌던 그날 아침에 나는 동생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아버지의 '아조 나쁜 놈'이었고, 내 책임을 동생 선길이에게 떠넘겼으니 담임선생님의 '아주 나쁜 어린이'였다.
그러나 저러나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는 영락없이 지각을 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해변으로 난 등굣길을 이를 악물고 내달렸으나 왼편 바다 쪽에서 파도 소리만 철석거릴 뿐 아이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개 속에서 누군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 길을 막았다.
"이거이 누구여? 선호 아니라고?"
"어, 장열이 아제!"
반가웠다. 용출리에 사는 그는 아버지의 고모 쪽으로 먼 친척뻘이었는데 우리는 그저 장열이 아제라 불렀다.
"아제, 내가 늦잠을 자니라고 학교에 늦어부렀는디 혹시 종치는 소리 못 들었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장열이 아제가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손바닥을 철썩, 마주친 다음에 말했다.
"학교 종 말이제? 여러 번 쳐부렀는디, 너 큰일 났다."
"시작종을 여러 번 쳐부렀다고라우? 그라먼 멫 교시가 끝나부렀으까?"
"언능 가봐라. 시방 아그들 다 교실에 앙저서 공부하고 있드라. 그라고, 교장 선상이 말여, 늦게 온 놈 띠디레 팰라고 겁나게 큰 몽둥이를 들고 교문 앞에 지키고 섰드랑께. 너는 인자 죽었다."
장열이 아제의 그 얘기를 듣고 나자 나는 다시금 오줌을 찔끔거릴 정도로 겁에 질려 버렸다.
교문에 당도하여 쪼뼛쪼뼛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바람이 불 때마다 국기 게양대의 도르레가 쇠파이프깃대에 부딪치는 소리만 쟁겅쟁겅 울려올 뿐 교정은 온통 적막하였다. 교실 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였다. 오리걸음으로 화단 가장자리로 다가가서 아주 천천히 허리를 펴고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았는데 교실에는 아이들은커녕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그 누구냐? 굴전리 이제해 아들놈 선호 아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교감 선생님이 사택 마당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양치질을 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나는 그쪽을 향해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뭔 놈의 학교를 이렇게 일찍 나왔다냐? 잘 됐다. 거그 복도에 있는 쓰레받기 들고 운동장 한 바쿠 쭉 돌면서 쓰레기나 조깐 줏어라."
교감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허탈했다. 나는 화단 모서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으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허기가 밀려왔다.
'맞어. 장열이 아제가 바로 그 장열이인디 그걸 몰르고…'
그때에야 아침에 등굣길에 만났던 장열이 아제가 굴전리와 용출리에 이미 소문이 파다한 '거짓말쟁이 장열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는 양쪽 마을 주민들로부터 공인받은 거짓말쟁이였다. 장열이 아제가 무슨 일로 그렇게 매일이다시피 발품을 팔며 이 마을 저 고을로 돌아다녔는지 나이 어린 우리는 알 길이 없었으나, 어쨌든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용출리에서 우리 마을인 굴전리로, 그리고 여객선 부두가 있는 큰 마을 서성리로, 혹은 그 옆 마을인 유촌리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는 오며 가며 우리 마을을 지날 때마다 거짓말 한 가지씩을 흘리고 가는 것을 잊는 법이 없었다.
"성님, 큰일 나부렀단 말이오. 아까징끼 조깐 볼라 주시오."
어느 날 저녁 어스름에 장열이 아제가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아버지에게 약을 발라달라면서 바짓가랑이를 걷어보였다. 무릎 아래쪽에 살갗이 조금 벗겨지고 피가 맺혀 있었다. 아버지가 머큐로크롬(속칭 빨간약)을 꺼내서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 상처는 별것 아니었다. 어린 우리들도 산으로 들로 갯바탕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그 정도 타박상을 입는 건 예사였지만 장열이 아제처럼 그렇게 엄살을 부리지는 않았다. 살갗이 벗겨지는 정도의 타박상을 가지고 큰 부상을 입은 것처럼 엄살을 부린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심조심 댕길 일이제 어짜다가 그렇게 다쳤소?"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다 대접하며 그렇게 물었을 때 그의 입에서 술술 풀려나오는 거짓말이 문제였다.
"서성리 객선머리에 일보러 갔다가 어둑어둑해져서 여그 굴전리로 넘어오는디, 쩌그 당집 지나서 성제바우 안 있소. 거그 올라오다가서 딱 만나부렀단 말이오."
"뭣을 만나부렀소?"
"도깨비 두 성제가 내 앞을 딱 가로막듬만 씨름을 하자고 안 그라겄소. 내가 즈그 둘을 이겨야 보내준다고"
그 얘기라면 나도 두어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장열이 아제가 모처럼 무릎아래에 난 상처를 증거로 제시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좀 실감나는 진짜배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실망이었다. 장열이 아제의 얘기가 길어질 듯하자 아버지가 서둘러 나서서 정리를 했다.
"그란디 그 도깨비들이 자빠지면 또 일어나서 씨름을 다시 하자고 자꼬 그랬제?"
"성님이 그것을 어치케 알었소?"
"그래서 자네가 그 도깨비 둘을 허리끈으로 기냥 나무에다가 딱 묶어놓고 재를 남어왔제?"
"이번에는 허리끈이 아니고 칡영쿨로 묶어놓고 왔는디…"
"씨름을 몸으로 했는지 입으로 했는지 모르겄네마는 어쨌든 고상했네. 시장했을 것인디 밥이나 묵소."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상대방의 말을 믿기 어렵다고 말하고 싶을 때 "장열이 도깨비 만난 얘기 하고 있네"라고 했다. 장열이 아제가 사람들에게 하는 거짓말의 대부분은 도깨비나 귀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그의 거짓말이 스스로의 신용이야 갉아먹을지언정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등굣길에, 수업종이 여러 번 울렸다느니 교장선생님이 독이 올라 있다느니 하는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나는 철봉대 밑에 쓰레받기를 던져두고 가장 낮은 철봉을 잡았다. 두 다리를 공중으로 뻗어 올려 철봉을 양쪽오금으로 물고서 거꾸로 매달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꿈속에서 본 고무신짝 비행기를 타고 창공을 나는 기분이었다. 너무 어지러웠으므로 나는 철봉에서 내려, 모래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그 때,
'이거이 뭣이여? 돈!'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씨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모래밭에 4등분쯤으로 접은 지폐가 언듯 비쳤던 것이다. 새로 나온 1원짜리 지폐였다. 놀라운 것은 접혀 있는 1원짜리 지폐를 펴자 그 안에 5원짜리 지폐 두 장과 10원짜리 한 장이 겹쳐서 접혀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떨렸다. 사방을 둘러봤으나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교실로 들어가서 내 자리에 앉았다. 우선 1원짜리 지폐를 허공에 치켜들고서 관찰했다. 틀림없이 진짜 돈이었다. 그 무렵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면서 화폐가치도 10배로 올랐다. 마을 구판장에서 파는 국민학생용 공책 한 권이 20환이었는데 통화개혁이 되고나서는 2원이 되었다. 우리는 새로 나온 1원짜리 돈이 신기해서 이러 저리 관찰하다가 지폐 가장자리의 흰 바탕 군데군데에 머리카락 같은 것이 인쇄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그것이 있어야 진짜배기 돈이라 했다. 철봉대 밑에서 주운 1원짜리에도 어김없이 머리카락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주운 돈의 가치를 이리저리 셈해보았다. 1원에 비과라는 과자를 여덟 개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무려 21원!
나는 일단 그 돈을 필통의 종이깔판 아래에 감췄다. 양철필통에 연필을 그냥 넣은 채로 책보를 싸면, 허리에 차고 내달리는 동안에 연필이 흔들거려서, 나중에 칼로 깎아보면 심이 토막토막 부러져 있기 일쑤였기 때문에, 종이를 접어서 바닥에 깔았던 것인데 그 밑에다 문제의 그 지폐 넉 장을 펴서 감춘 것이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시작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필통 속의 그 지폐 때문에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반 아이들이 여든 명이 넘다보니 거의 매일이다시피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새 공책을 잃어버렸다, 삼촌이 사다 준 연필 한 다스가 없어졌다, 산수책을 누가 가져갔다, 새로 신고 온 고무신을 누군가 훔쳐갔다….
그럴 때마다 도시에서 온 그 여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눈을 감게 하고서는 예의 그 잔소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종례 때마다 학생들에게 이런 문답 교육을 되풀이했다.
-복도나 운동장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발견하면 어떻게 한다?
"선생님께 갖다 드려요!"
-학교 파하고 마을에서 돈이나 물건을 주우면 어떻게 한다?
"부모님이나 이장님께 갖다 드려요!"
-산이나 들에서 이상한 그림이나 글씨가 씌어 있는 삐라를 발견하면 어떻게 한다?
"선생님한테 갖다 드리거나 지서에다 갖다 줘요!"
그러나 나는 그 날 철봉대 밑에서 주운 돈 21원을 선생님에게 갖다 주지 못 하였다. 방과 후에 구판장에 가서 어머니 심부름으로 빨랫비누 한 장과 고무줄을 사면서, 필통 속의 돈 중에서 1원만 헐어서 사탕을 사먹을까 생각에 잠기기도 했으나, 결국 가슴이 떨려서 그렇게 하지 못 하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삶은 고구마와 열무김치로 허기를 때웠다. 그러나 필통 속의 돈을 생각하자 또 다시 가슴이 떨렸다.
"너 아디 아픈 거 아녀? 아이고메, 이마빡이 불덩어리 같은디? 학교에서 뭔 일이 있었냐?"
"아녀, 암 일도 없었고 암시랑토 안하당께."
나는 자꾸만 내 이마를 만지려는 어머니의 손을 밀쳐내고는 일단 사립을 빠져나왔다.
"동네 사람들! 시방 동백나무집 김대남 씨 집에 불이 났응께, 싸게 싸게 불끄러 나오시오!"
잠이 들었는데, 꿈결인 듯 윤식이 아버지의 욋소리가 들여왔다. 윤식이 아버지는 이장을 도와서 마을의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맡아 하는 동네 소사였다. 겸하여 확성기가 없던 당시에 마을의 공지사항을 육성으로 전달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팽나무 고목 위에나 혹은 돌담 꼭대기 등 마을 이 곳 저 곳의 높은 지대에 올라서서는, 있는 힘껏 목청을 돋우어 공지사항을 알렸다.
"오늘 썰물 때 공동작업으로 톳을 비는 날잉께, 집집마다 남자 한 사람씩 낫꾸 들고 바지게 지고 갯바탕으로 나오시오!"
윤식이 아버지는 같은 내용을 방향을 바꿔가며 외쳐댔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욋소리'라 불렀다. 그런데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질 무렵에 갑자기 외쳐대는 그의 욋소리는 목소리 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남씨 집에 불이 났응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다 싸게싸게 불끄러 나오시오!"
동백나무집으로 통하는 그 집은 우리 꼬마들 사이에서도 알부자로 소문이 자자한 집이었다. 나는 이웃집 희찬이와 함께 동백나무 집으로 불구경을 가면서도 필통 밑바닥에 감춰두고 있던 불로소득 21원을 어찌해야 할 것인지, 그 고민을 떨쳐버리지 못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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