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성공 뒤엔 늘 숨어있는 엄마의 노력이 있었다
김혜원
엄마는 대부분의 어머니들처럼 당신의 70평생 대부분을 시부모 봉양과 남편 뒷바라지, 자식들 뒤치다꺼리로 보내신 분입니다. 갓 시집온 이십 대 새댁 때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 속에서 열 식구도 넘는 가족들의 끼니를 챙겨야 했고 간신히 가난을 벗어나나 했던 삼십 대엔 무던히도 속을 썩이던 남편 때문에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룰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마흔은 백반집 아줌마로 시작됩니다. 남편의 사업부도로 살길이 막막해진 엄마가 살던 집을 개조해 식당을 차렸던 것이죠. 새벽 다섯 시 새벽장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밤 열두 시 마지막 술 손님이 남기고 간 안주 그릇을 치울 때까지 엄마는 기름에 전 앞치마를 벗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네 아이들을 공부시켰고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시부모를 봉양했던 엄마. 그리고 엄마 나이 오십. 편안한 중년을 맞는가 했지만 그것도 잠시, 엄마는 다시 치매에 걸리신 시부모님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성질 불 같고 감정 기복이 심한 남편과 함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맏며느리 시집살이 40년을 겪어내며 엄마가 배운 것은 한 가지. "나 한사람 참고 견디면 온 가족이 행복하다"였습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억울해도 억울하다 표현하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고, 미워도 밉다고 말하지 않는 엄마.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무시해도 참아내던 그런 엄마를 보면서 도대체 왜 저렇게 참고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너무도 답답해 왜 그러고 사느냐며 짜증을 부릴라치면 "내가 참아야 너희들이 편안하지. 나 하나 참아서 자식들이 편안하고 집안이 조용하면 된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엄마. 그래서 전 어느 날부터 엄마는 늘 그 모든 것을 참아내고 그렇게 참아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 말이죠.
육십 중반. 치매를 앓던 시부모님을 하늘나라 보내드리고, 친정아버지까지 보내드린 엄마는 잠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쉼'의 시간을 갖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오래지 않아 깨지고 맙니다. 아버지에게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엄마는 또다시 느슨하게 풀어 두었던 행주치마의 끈을 꼭 죄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그렇게 살았듯 또 다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각오를 단단히 했던 것이죠.
엄마의 병명은 다름 아닌 '화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