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주일간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쌍용차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이 뒤에 숨어 노동자의 손에 쇠파이프와 볼트·소화기를 쥐어주고 동료의 뒤통수를 내리치라 했던, 끔찍한 전쟁이 멈추었습니다.
굴뚝 위 온도를 40℃가 넘도록 뜨겁게 달구던 뙤약볕이 지나고 잇따라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지난 밤, 그 지난 밤 연이어 불어닥친 비바람은, 40일이 넘어 구멍이 뚫리고 삭아버린 비닐을 뚫고 굴뚝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테이프를 붙이고 그 위에 또 붙여도 소용없었습니다. 포기하고, 우비를 입었더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비상식량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이었습니다. 주말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며칠 동안 굴뚝 위에 식사가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이어 라면을 먹었더니 속에서 탈이 나버렸는지 계속 설사를 했습니다. 간밤에 잠을 계속 설쳤더니 졸음이 몰려옵니다.
곳곳에서 비명만... 참혹했던 60시간의 전쟁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지난 6월 22부터 용역깡패 500명과 구사대 2천명이 경찰병력의 호위 아래 공장으로 밀고 들어오는 광경은 흡사 군사작전 같았습니다. 첫날은 공장의 울타리를 부수고, 둘째날은 바리케이드를 철거했습니다. 그리고 25일부터 2박3일, 60시간의 끔찍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쇠파이프와 방패, 볼트와 소화기를 들고 공장으로 쳐들어온 용역깡패와 구사대는 곳곳에서 우리 조합원들을 공격했습니다. 지게차를 밀고 들어와 소화기와 쇠파이프로 조합원의 뒤통수를 내리쳐 피가 흐르는 광경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고, 멀리서 가족들이 울부짖었지만, 그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밤과 낮이 없었습니다. 전쟁을 멈춘 시간은 식사시간뿐이었습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저들은 뒤늦게 밥을 먹는 우리 조합원들을 그대로 공격했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해 구급차를 불렀지만 잔인한 저들은 구급차조차 공장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굴뚝 위에서 그저 애타게 "죽으면 안 돼, 제발 죽지마"하며 혼잣말만 되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서진 기계 내팽개쳐진 부품들... 처참한 현장
27일 밤 10시 "더 이상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터를 지켜낼 수 없다"며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고 저들은 공장을 떠났습니다. 저들이 떠난 공장은 폭격을 맞은 듯 처참했습니다. 저들은 공장을 다시 가동하기 위해 보호하고 있었던 부품과 생산시설까지 부수고 나갔습니다.
부서진 부품과 기계들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다시 들어가 일해야 할 공장이고, 우리가 조립해야 할 소중한 부품들을 부수고 짓밟을 수는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공장, 노동자의 기계가 용역깡패들에게는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겠지요.
저들은 공장만 초토화시킨 게 아니었습니다. 회사는 일 밖에 모르는 순진한 노동자들의 손에 쇠파이프와 볼트를 쥐어주고 수십 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향해 휘두르게 만들었습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불구덩이 속에 내던짐으로써 인간성마저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렇게 피 말리는 60시간이 지나고 잠시의 평화가 찾아왔지만 마음은 불구덩이가 들어앉은 듯 좀체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지난 일요일(28일)에는 일주일 만에 가족들이 공장을 찾아왔습니다. 생사를 걱정하며 이틀 밤을 공장 앞에서 뜬눈으로 지샌 가족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남편을 만났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닦아주며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에 저도 덩달아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됐습니다. 정문 앞에 와서 손을 흔드는 제 아내와 두 아이의 모습을 저는 망원경으로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7년 동안 밤낮 없이 비정규직으로 일한 대가가...
2003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월차를 단 두 개밖에 쓰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용접 일을 시작해 쇠를 깎는 사상 조립 작업(그라인딩작업)까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쌍용차에서 보낸 7년의 세월 중에서 가장 기억이 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2005년 쌍용자동차 대표로 정규직과 함께 전국 품질분임조대회에 출전을 했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통령 은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저희집 거실에 자랑스럽게 놓여있는 메달을 보며,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빠를 자랑하곤 합니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노동과 기술력으로 만든 쌍용자동차였습니다. 1년에 월차 한 번 쓰지 않고, 대통령상까지 받은 기술로 무쏘·코란도·로디우스·렉스턴 같은 자랑스런 차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쌍용자동차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산업은행 총재님, 그리고 높으신 장관님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상하이자동차에 2700억이나 빌려주면서 기술이전을 제한하는 약정을 없애버렸습니다. 상하이자동차는 10억 달러 투자약속은 물론 신차 개발 등 어떤 투자도 하지 않고, 핵심 기술을 빼낸 후 흑자회사를 빚덩이로 만들어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쌍용차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산업은행과 상하이자동차에서 누가 책임을 졌습니까?
지금 쌍용차에 필요한 건 공권력이 아닌 공적자금
민주당 정세균 대표님, 그리고 국회의원님들.
우리 노동자들이 그토록 반대했는데, 노무현 정부는 외자유치를 떠들면서 상하이자동차에 쌍용차를 고물 팔아치우듯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노동자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까? 왜 우리들이 임금을 못 받고, 왜 우리들이 해고되고, 왜 우리들이 잡혀가야 합니까?
왜 우리들의 죽음과 절규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오늘(6월 30일) 전경버스 50여대에서 내린 경찰들이 공장 정문과 후문을 둘러싸고 공장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용역깡패와 구사대가 떠나면서 요청했던 공권력 투입이 곧 시작될 것 같아, 두려움이 또 다시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쌍용자동차에 투입해야 할 것은 공권력이 아니라 공적자금입니다. 특공대가 아니라 정부의 교섭대표가 쌍용자동차에 투입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쌍용자동차 사태는 제2의 용산참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우리 조합원들이 특공대와 전투경찰의 곤봉과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도록 제발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정부가 대화와 교섭에 나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70m 굴뚝 위에서 그 처절한 절규와 참혹한 살육을 지켜보지 않도록 간절하게 호소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서맹섭 기자는 쌍용차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입니다.
2009.07.01 13:2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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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다시 에워싼 경찰에 두려움 '오싹' 지금은 공권력 대신 공적자금 투입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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