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대, 언론개혁시민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회원들이 2일 오전 서울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대한늬우스 상영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체육관광부를 정부의 꼭두각시로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유성호
문화부의 '정책 커뮤니케이션' 거참 희한하네 국민을 홍보와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6~70년대 산업화 초기의 습속이다. 당시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교육수준도 높지 않았기에 계몽과 홍보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국민의 대다수가 정보 프롤레타리아이고, (MB도 한탄하듯이) 고졸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가는 과잉교육의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낡은 산업혁명의 자식들이 디지털 혁명의 자식들을 가르치겠단다. 이건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문제. 한 마디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에게 문명을 가르치려 드는 격이다.
눈 뜨고 봐주기 민망한 '대한늬우스'를 놓고, 문화부 제2차관은 "어쨌거나 이슈화되지 않았냐", "광고를 잘한 것"이라 말했단다. ('문화부 4대강 대한늬우스 자화자찬 파문' 미디어오늘 2009/07/02) 내친 김에 '대한늬우스' 2탄도 극장에 걸 작정이란다. ('대한늬우스 2탄, 이 달 25일부터 상영' 조선일보 2009/07/01) 반발을 하든 말든, 그냥 가겠다는 얘기다. 황당한 것은 문화부에서는 이런 짓을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증세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앞으로도 정부 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홍보 방안을 강구하여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대한 늬우스 15년만 부활…문화부 "대화가 필요해"' 서울신문 2009/06/24)
이 문화부의 처방을 뒤집으면, '그 동안 국민과 소통이 안 된 것은 정부 정책이 너무 어려워 국민이 편하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진단을 얻게 된다. 한 마디로 국민들이 우매하다는 얘기다. 그 문건 속의 구절이 생각나지 않는가?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 잘 꾸며서 재미있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 가능." 이런 생각이야말로 문화부에서 개그맨을 동원해 대한늬우스를 찍는 동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지도 모른다.
최근 문화부의 행태는 문화부 홍보지원국에서 유출된 그 문건을 연상시킨다. (작성자는 이게 공식적 강의 자료가 아니라, 강의를 위해 잠깐 열었던 개인파일이 사고로 노출된 것이라 해명해 왔다.) 그 안에 소개된 내용들은 거의 괴벨스의 선전선동 전략을 연상시킨다. 위에 인용한 기사(
'대중은 멍청, 인터넷 매체 몇 푼 쥐어주면 돼' 미디어오늘 2008/05/28)에 문건의 전문이 실려 있으니, 일독해 보시기를.
'정책 커뮤니케이션'이란 게 원래 야비하기 그지없는 것일까? "대중은 조작과 영합의 대상", "이해찬 세대는 부리기에 유리한 집단", "인터넷게시판은 가난한 이들의 한풀이 공간", "비판적 미디어비평 기자들 엉겨주면 뿌듯해해", "복잡한 방송판 기생집단 활용해 관리". 마키아벨 리가 환생한듯하다. "주둥아리로 출세하는 방법"이라는 항목이 눈길을 끈다. 배워서 출세 좀 할까 들여다봤다가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혹시 이게 문화부의 인터넷 낭인 채용규정(?)이었던 건 아닐까?
"가급적 사람들이 잘 아는 '센 놈' 하나를 골라 밟아야 잘 뜬다. 몸값이나 Media 역량이 안 되면 뭉쳐서 떠든다. 정부 위원회, 자문그룹에 마지못한 척 낀다. 조금밖에 몰라도, 떠들다 보면 남들이 전문가라고 하고 정보도 생김. 무작정 / 좌우간 한쪽 편을 골라서 떠든다. 사냥개는 생각이 필요 없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은 불러서 쓰는 놈도 헷갈려. 진영논리에 충실해야 낙전이라도 주워 먹는다." ('공공갈등과 정책 커뮤니케이션의 역할' 2008년 2008년 5월)
최근 권력의 사냥개가 되어 천방지축 날뛰는 자들의 인생철학이 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밤하늘에 별이 스치우듯, 문득 머릿속으로 얼굴 하나가 스치운다.
문화부의 MB식 예술관 문화부의 주업무인 예술정책으로 넘어가 보자. 정치적 수구는 문화적으로도 수구여야 하나? 정치적 입장과 문화적 감성 사이에도 모종의 연관이 있는 모양이다. 한겨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유인촌 장관은 한예종의 학생을 물리친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결국 '예술학교에서 왜 이론을 가르치냐'고 하던 무식한 문화판 뉴라이트 논리의 반복이다.
최근 만난 무용원 학생이 '통섭은 트렌드이고 앞으로의 예술 방향인데,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하길래 '발걸음 걷는 연습부터 해라. 명인들이 평생 발 올리는 연습을 한다.'고 말해줬다. 기량을 먼저 익혀야 한다. ("연극인 시국선언 땐 딱 관두고 싶더라" 한겨레신문 2009/07/02) MB의 낡은 산업화의 관념이 유장관의 입을 통해 예술론으로 환생했다. 기량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기량만으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서커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뒤샹이 변기에 사인을 하고, 폴록이 화폭에 물감을 흘리고, 뉴먼이 화폭을 롤러로 밀고, 폰타나가 캔버스를 송곳으로 뚫고, 미니멀리스트가 철공소에 전화를 걸고, 워홀이 직원에게 작품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케이지가 4분33초 동안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데에 과연 얼마나 많은 기량이 필요했을까?
한 사회의 경제수준과 예술의 상태 사이에는 묘한 평행이 존재한다. 가령 70년대 한국은 기능 올림픽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휩쓸곤 했다. 그렇다고 당시 한국의 기술이 세계 최고였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몸을 굴려 기량을 연마할 때, 선진국 사람들은 정신을 굴리며 컨셉트를 잡고 있었다. 한국의 예술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가령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한국의 예술가들을 보라. 대부분 연주자나 무용수와 같은 퍼포머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쓰는 창작자는 극히 드물다.
훌륭한 퍼포머도 그저 기량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거기에도 풍부한 교양과 섬세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령 외국에 유학을 간 한국의 학생들은 시험곡은 능숙한 기량으로 소화해내지만, 정작 다른 작품을 해석하라고 하면 당황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이런 예술적 상황은 묘하게도 기술의 상태와 조응한다. 가령 한국의 기술은 (메모리를 비롯한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아직 창의적 기술이 아니라 모방적 기술에 머물러 있다.
MB의 예술철학(?)은 더 직접적인 형태를 띄기도 한다. MB의 머릿속에 삽 한 자루만 들어 있다 보니, 문화도 삽질을 하는 걸까? 중앙일보 기자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데 이명박 정부는 문화정책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고 말하자, 촌사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청계천 복구도 문화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물론 건설이지만 그렇게 환경을 바꿔주면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거 아닌가요. 광화문 네거리에 건널목을 만든 거나 서울광장 등 그게 다 문화정책이죠. (...) 4대 강 정비도 마찬가지죠. 수질이 좋아지고 환경이 나아지면 자전거 도로가 생기고 크루즈도 뜨고 국토환경이 바뀌는 건데 (...) 문화정책이 없다는 건 난센스입니다."('파워인터뷰-취임1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일보 2009/04/28)한 마디로, 삽질이 곧 문화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뭐 하러 문화부를 따로 두는가? '작은 정부'의 모토에 따라 그냥 국토해양부에 통합시킬 것이지.
문화부의 홍인종 사냥 이런 수준의 교양으로 이 나라의 문화예술을 이끈단다. '예술에 왜 이론이 필요하냐'고 묻는 머리들 속의 비전이 오죽 하겠는가. 그리하여 지난 1년간 문화부에서 역점을 두고 진행한 사업이 고작 좌파척결. 전봇대 뽑는 저돌성으로 문화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역시 박힌 사람 뽑는 것뿐이다. 이는 그 자신도 인정한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가 임명한 산하 기관장들을 내보낸 겁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난 1년간은 이걸 정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았어요." (중앙일보 2009/04/28)지난 1년 간 "모든 역량"을 쏟아서 한 일이 고작 좌파척결. 그런 이런 기사도 있다. 부산일보 사설이다. 그 일을 하고도 자체적으로 이런 평가를 내렸단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유인촌 장관의 지난 1년간의 업무 평점이 'A' 수준을 상회한다고 자평하고 있다.('문화정책 예산지원도 지방홀대 심하다니' 부산일보 200/02/28)'A' 수준을 상회한다니, 장관님 점수 매기기 위해 A 앞에 알파벳 문자를 새로 만들어 드려야 할 판이다. 물론 문화부 밖의 평가는 이와 사뭇 다르다. 사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인적 청산 작업 말고는 뚜렷이 부각되는 것도 없다는 게 중론이다. (위의 사설)문화부 안에서는 A+를 받았으나, 문화부 바깥의 중론은 사람 잡는 일 외에 생각나는 업적이 없다는 것. 한겨레신문의 인터뷰에는 재미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기자가 "보수 인터넷 매체들의 한예종 공격과 감사 내용 등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지적하자, 유장관은 이렇게 대꾸한다.
"학교에서 그런 얘길 많이 하더라. 변희재씨가 공격을 주도하던데, 황 전 총장의 서울대 미학과 후배더라.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다." (위의 기사)"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백남준이 독일문화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벤야민이 문화비평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 처참한 교양의 소유자다. 어차피 수준이 비슷해 보이니 만나면 말도 아주 잘 통할 게다. 게다가 평소에 즐겨 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은가. MB 정권이 적어도 한 명의 국민(?)과는 대화가 통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이 소통부재의 시절에 참으로 귀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완장과 명찰의 정치 어떻게 봐야 할까
좌파적출의 메스는 감사. 감사라고 변변할까? 감사의 수준이 거의 개그 콘서트다. '회의실 의자가 열다섯 개인데 왜 세 개를 더 샀냐'(방만한 예산집행), '총장실에 왜 북한 우표책이 있냐'(남북교류협력법 위반), '국회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왜 한강 둔치에 나가 사진을 찍었냐'(근무지 이탈). 그래도 한예종 감사는 양반이다. 영화판에서는 "연간 1000만원 남짓 지원하는 조그만 영화제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다." ('유인촌은 MB가 아니라 우리가 내친다' 시사IN 2009/06/22)
문화부의 이런 조폭적 행태는 당연히 문화계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문화행정은 실종된 대신, 감찰활동은 독재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원에 인색하고 간섭에 능하며, 심지어 공포를 주는 문화부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위기에 빠뜨린 유인촌 장관은 스스로 물러나야 합니다." ('상상력에 자유를! 문화예술의 자율성 회복을 위한 미술인 성명' 오마이뉴스 2009/06/12)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도 나섰다.
낡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어 단죄하고 처형하는 작태는, 마치 바우하우스의 예술가들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이며 독재의 기반을 다지던 과거 독일의 나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 완장 찬 사람들이, 미운 놈이면 아무한테나 명찰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완장과 명찰의 정치를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까지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예술과 학문은 정권의 전리품이 아닙니다. ('한예종 사태를 염려하는 영화감독 100인 선언 전문' 스타뉴스 2009/06/18) 영화계에 이어 유장관의 옛 '나와바리'에서도 성명을 발표했다.
연극 연출가와 배우 등 연극인 1천37명이 25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연극인들은 시민들과 연대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신명을 바칠 것을 엄숙하게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문화와 예술의 환경조차 관치로써 재단하는 퇴행적 행태는 문화대중 및 예술인의 자존심과 정신적 생명권을 참담한 지경으로 유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현 정부에 대해 (...) 구시대적, 반예술적 문화정책 중단 등을 요구했다. ('연극인 1천여명 시국선언 동참' 연합뉴스 2009/06/25) 연극계에서조차 자신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연극인 시국선언 때는 딱 관두고 싶더라. 명단을 일일이 다 봤다. 그 가운데 내가 가르친 애, 유씨어터에 있던 애도 있었다. 그래서 너무너무 깜짝 놀랐다. ("연극인 시국선언 땐 딱 관두고 싶더라" 한겨레신문 2009/07/02) 심지어 자기가 가르친 제자까지도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상황. 그는 이 상황을 마음속으로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을까? 어쨌든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참상이 촌사마께서 단 1년 반 만에 이룩한 업적이라는 점이다. 불도저 같은 그 추진력 하나는 높이 사줄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