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실은 달력을 탐하는가

역사속 달력이야기

등록 2009.07.08 18:04수정 2009.07.1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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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드라마 <선덕여왕>에 '사다함의 매화'가 대명력이라는 책력으로 밝혀졌습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므로 사실관계는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왜 그토록 미실은 '책력'에 집착하는지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있었던 달력과 연계해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의 천문기상학


드라마 속에서 미실은 '신관', 또는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명의 여명기에 이 역할은 이후 분화되어서 삼국시대 후반기에 이르면 의술을 맡고 약재를 관리하는 일을 하는 관리이거나 천문, 기후관련 일을 맡아보는 일관 등으로 분명해집니다.

의술의 경우에 '신관'적 역할은 조선시대에도 남아있었습니다. 전염병이 돌면, 도시의 빈민들은 혜민서에서 치료를 맡았는데, 그 치료법 가운데 하나가 '굿'이기도 했습니다.

천문, 기후 관련 역할을 담당하는 일에도 '신관적' 역할은 여전히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조선 세종시대에도 일년의 기후를 예측하는 방법은 점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과학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일기예보는 통계학적인 방법을 쓰니까요.

삼국시대에 특별히 이 역할이 중요해진 것은 천재지변이 잦은 백제와 신라의 특별한 사정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본이나 베트남,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농업국가의 공통점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면에서 이집트의 제사장은 정말 축복받은 존재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농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나일강이 범람하는 때였는데, 나일강은 태양이 한 바퀴 돌은 뒤인 365일 6시간 뒤면 어김없이 범람했습니다. 제사장은 이 별로 비밀스러울 것도 없는 비밀을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와 제사의식으로 포장한 뒤에 아침 일찍 일어나 동쪽 하늘을 바라보다 시리우스별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린 후 즉시 파라오에게 달려가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나일강은 혼갖 무기물을 가득 실고 와서 대지로 쏟아놓고 이집트인들은 이 축복받은 곳에 농사를 지으면 대풍은 약속된 미래였습니다. 이 비밀이 오래갈리 없었고, 제사장들은 곧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달력은 기원전 45년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 로마제국의 달력인 율리우스력으로 채택된 후 그레고리오력을 거쳐 지금은 전세계에서 사용하는 달력방식이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동양 천문학자들의 일은 지극히 복잡했습니다. 태풍, 홍수, 가문, 일식, 월식… 숨가쁜 자연격변속에 놓여진 그들의 목숨은 늘 위태로웠지요.


중국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나라를 세우면 가장 정확한 달력을 백성들에게 반포해주는 것을 제왕의 임무로 여겨왔습니다. 하늘의 시간을 읽어 낼 수 있는 자신이야 말로 하늘의 아들(천자, 天子)이 될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 왕조가 들어 설 때마다 새로운 방법으로 하늘의 시간을 읽어냈다며 새로운 역법을 들고 나와 달력을 새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달력을 만들 수 있는 것도 그래서 왕 뿐이었습니다.

9세기 경 중국에서는 '황실 천문대의 관측자들에 대해서 관측에 관한 일을 비밀로 하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다른 부서 관리들이나 일반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허가없인 불가능했습니다. 비밀을 지키는지를 감독하는 감찰관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구체적으로 천문기상관련 관리인 일관이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입니다. 이시대가 바로 중앙집권적 농업국가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임금은 하늘의 일,즉 천문과 기상의 변화를 백성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일에 탁월한 능력이 없다면 '왕'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연오랑과 세오녀'는 그런 위기를 보여줍니다. 아마 일식과 월식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설화속의 신관 연오랑은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해 '비단짜는 법'을 알아낸 것은 아닐까요?

어찌되었든 하늘의 일을 아는 사람만이 제왕의 자격이 있었으니 미실이 책력을 탐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는 왜 선덕여왕 때 첨성대를 지었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지만, 어쩌면 하늘을 정복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하려던 여왕의 포부가 담겨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우리나라 최초의 달력

기록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 달력의 증거는 부여의 영고가 아닐까 합니다. 영고란 말은 '북을 치면서 맞이하는 굿'을 치렀기 때문에 이름 지어졌습니다. 부여의 모든 부족이 한자리에 모여 북을 치며 맞이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민족 달력이 출발합니다.

부여인들이 맞이한 것은 '새로운 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새롭게 태어난 해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새해맞이굿'을 벌인 것이지요. 새롭게 태어나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부여인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옥한 땅에 터를 잡은 듯합니다. 적당한 강수량과 알맞은 온도에다 태풍이나 홍수도 없는 곳이 바로 송화강 유역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단 하나의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씨앗을 싹트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지를 정점으로 점점 태양고도가 낮아지다 동지에 이르면 모두 모여 굿을 벌였습니다. 부여의 족장은 더 이상 해가 사라지지 않고 고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제사장의 '예언'을 받으면, 재신임되었고요. 그날이 바로 동짓날입니다.

동짓날, 해는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합니다.·그래서 이날 뜨는 '새로운 해'이고, 이날이 새해첫날입니다. 이것을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는 은력 정월초하루라고 표현합니다. 은력은 은나라 달력이니, 중국의 은나라도 동짓날을 새해 첫날로 썼습니다.

동짓날을 새해 첫날로 쓴 것은 서양, 적어도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던 적이 있나 봅니다. 로마도 처음엔 농업국가였고, 해를 숭배했습니다.

삼한시대에도 절기를 예측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마한 사람들은 매해 5월, 씨뿌리기 전에는 풍년을 빌었고,10월에 추수가 끝나면 무사히 곡식을 걷게 해준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a 농경문 청동기 삼한시대 농경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5월과 10월의 제사의식에 쓰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입니다.걸어놓고 두드리는 용도였던 것 같습니다.

농경문 청동기 삼한시대 농경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5월과 10월의 제사의식에 쓰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입니다.걸어놓고 두드리는 용도였던 것 같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 의식을 알려주는 <농경문 청동기>의 그림속에 있습니다. 그림에는 머리 위에 긴 깃털 같은 것을 꽂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와 괭이를 치켜든 인물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항아리에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인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맨 처음 씨뿌리기를 할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따비로 밭을 일구는 사람이 발가벗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는지 조선시대에도 입춘날 아침에 밭을 가는 자와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옷을 벗게 하여 차가운 기운을 몸에 닿게 하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흉년과 풍년을 점치고 풍년을 바라는 의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해 보이는 의식이 오래토록 치러졌던 것은 매우 과학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씨뿌리기에 알맞은 기후를 선택하려던 것이지요. 밭을 갈 때 옷을 벗으면 공기의 기운을 그대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추우면 닭살이 돋을 것이고 더우면 땀이 흐를 것입니다. 어떤 쪽에 가까운가를 보면 씨뿌리기가 정확한 날짜에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고, 따라서 일 년농사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을 것입니다. 깃털을 꽂은 것은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를 짐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그림으로 남겨진 첫 번째 일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도 중국의 달력을 본격적으로 쓴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백제의 달력입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매우 가까웠던 백제는 '원가력'이라는 달력을 씁니다. 이 달력은 매우 특이하게 동지가 아니라 우수를 일 년의 시작으로 여깁니다. 우수는 입춘 후 15일 후인 양력 2월 19일경으로 중국에선 봄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3. 고려시대 달력

고려시대의 달력은 '선명력'이 쓰입니다. 이 달력의 특징은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 능력이 탁월한데 있었습니다. 농경국가에서 달력은 제왕의 상징입니다.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라고 여겼고,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으니, 만일 하늘에서 생긴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면 백성들은 왕을 의심합니다. '혹시 하늘이 우리 임금을 벌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인 일식과 월식을 미리 예고할 수 있는 능력이 고려시대처럼 중앙집권적 국가의 필수 능력이었습니다. 선명력은 그런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바로 이 달력에 메톤주기가 도입됩니다. 메톤주기는 지구의 둘레를 달이 돌고 다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기 때문에 생깁니다. 

태양을 기준으로 한 1년의 길이는 대략 365일과 6시간 정도입니다. 이것은 태양의 높이를 측정하여 계산이 가능합니다. 태양이 가장 높을 때는 태양그림자가 가장 짧고, 반대로 태양의 고도가 낮을 때인 동지에는 그림자가 가장 길게 됩니다. 태양의 그림자는 하지에서 동지사이를 반복해서 왔다갔다 합니다.

달은 그 모양을 보고 시간을 측정했습니다. 이번 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까지를 '한달'이라고 하였던 것이지요. 이것은 수렵을 하던 선사시대 인류가 시간을 계산하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지혜가 생긴 인류는 동물들의 임신기간에 수렵을 그만두지 않으면 식량이 바닥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임신기간을 측정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달의 모양을 이용하였습니다. 아직도 임신주기를 '달'로 표시하는 것도 이런 전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축민족의 후예인 이슬람에서는 '신월'이 뜨는 시간을 기해 일제히 라마단에 들어가는 종교의식을 위해 흐린 날에는 기구를 띄운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름달에서 보름달까지 걸리는 시간은 삭망월이라고 하는데 대략 29.5일이 걸립니다. 음력의 한 달 길이가 29일과 30일이 반복되는 것이 달의 모양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달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일 년의 길이는 354일. 태양을 기준으로 한 1년의 길이와의 차이는 나중에 모아서 '윤달'로 상쇄하게 되는데요, 이 주기가 19년에 7번입니다. 이것이 메톤주기와 일치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왜냐하면 달과 지구와 태양이 일렬로 서야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는데 태양과 달과 지구는 19년을 주기로 이 규칙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823년에 당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선명력은 이 메톤주기를 도입하여  일식과 월식능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다른 달력도 일식, 월식 계산법만은 선명력을 따랐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후기, 충선왕은 명군의 자질을 갖추었으나 시대를 잘못만난 불운한 임금이었는데요, 왕위에 오르자 그는 학자를 사랑했고, 아버지 충렬왕이 원나라와 결탁하여 저지른 비리를 원상복구시키는 데 총력을 다합니다. 그런 왕에게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새로운 달력은 매우 중요한 통치수단이었지요. 그래서 그가 중국에서 새롭게 들여온 것이 '수시력'입니다. 고려의 충선왕은 1291년에 최성지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얻어와 쓰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를 지배한 원나라도 자신들만의 달력을 만들어, 하늘의 선택을 받은 황제로 군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공을 들여 만든 달력이 '수시력'입니다. 이 수시력은 중세 최고의 천문학자인 곽수경이 주도하에 1281년에 만들었습니다. 그는 정확한 달력을 만들기 위해 10미터 가까운 높은 규표를 만들어 동지를 정확하게 계산해내고, 일년의 길이가 365.2425이라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a 규표 143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세종대 규표의 1/10 축소형 복원품입니다. 규표는 규(圭)와 표(表)의 아주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규(圭)에는 그림자의 길이를 알 수 있게 눈금을 새겨 놓았으며 표(表)는 그림자가 잘 비쳐지도록 되어있는 기둥입니다.

규표 143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세종대 규표의 1/10 축소형 복원품입니다. 규표는 규(圭)와 표(表)의 아주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규(圭)에는 그림자의 길이를 알 수 있게 눈금을 새겨 놓았으며 표(表)는 그림자가 잘 비쳐지도록 되어있는 기둥입니다. ⓒ 여주 세종대왕릉


4. 조선의 달력

조선의 개국과 함께 역시 새로운 달력은 필수적이었습니다만, 조선의 특별한 군주 세종은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더이상 중국에서 달력을 얻어다 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글을 만드는 일과 더불어 거의 동일한 노력을 기울여 착수한 사업이 '조선의 자주적 달력'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투입된 조선의 엘리트는 엄청납니다. 먼저, 장영실을 천문학자와 동행시켜 중국에 연수를 보냅니다. 그래서 천문관측기기의 제작원리를 터득시킵니다. 달력은 관측 뿐만아니라, 천문학 계산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임금이 손수 수학공부를 하면서 수학을 장려합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인 수학자들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중인 수학자들은 가문의 세습적 기술인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계산 기술에 익숙할 뿐 수학적 원리에 대한 탐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계산만 뛰어난 그들은 천문학이 요구하는 수학 즉, 기하학적 계산을 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때, 새로운 천재가 등장하여 이일에 탄력이 붙습니다. 바로 이순지와 김담입니다. 그 두사람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적 달력인 '칠정산 내외편'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조선 성리학자들은 이것을 차츰 외면합니다. 중국 명나라 달력인 대통력을 '숭배'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대통력이 위기를 맞이한 사건은 중국에서 벌어집니다.

대통력을 이용한 중국 천문학자들이 일식을 틀리게 예측했지만, 그때 북경에 들어온 서양인 과학자들이 정확하게 일식을 예측해낸 것입니다. 비로소 동양 천문학이 서양에 그 자리를 넘겨주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서양인 과학자들이 명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만들기 시작, 이후 청나라 때 완성한 달력이 바로 '시헌력'입니다.

5. 시헌력과 그레고리력

시헌력의 가장 큰 특징은 태양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겨울과 여름의 길이가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에는 2월은 28일이고, 7, 8월은 31일입니다. 즉, 겨울은 빠르고 여름은 느린데, 이것은 태양이 그렇게 불규칙하게 (사실은 타원형으로)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1년을 24로 나눠 절기를 배치하면, 태양고도와 전혀 맞지 않는 절기가 만들어집니다. 시헌력은 절기 사이의 간격을 조정하여, 태양의 고도와 일치하는 달력이 된 것입니다.

가끔 보면, 24절기가 음력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동지부터 다음동지까지 24개의 절기를 배치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양력, 즉 태양력입니다. 서양에서 이 절기가 없는 것은 농업국가 절대왕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일년을 싹뚝 24개로 나눈 것을 평기법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의 우주론적 원리는 '혼천설'입니다. 즉, 천원지방설이지요. 하늘은 동그랗습니다. 그러니 동그라미를 24개로 나누면 그 간격은 동일할 것이라는 설입니다.

서양에도 처음의 우주론은 '완전한 원'이었습니다. 우주는 완전하고 그래서 완전한 도형인 원일 것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프톨레마이오스를 거쳐 심지어 갈릴레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케플러가 타원궤도를 발견할 때까지 동양과 서양은 모두 '완전한 원모양의 우주'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한 원모양의 우주를 따라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태양은 모순이 있었지요. 태양고도가 일정하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식과 월식이 매우 불규칙하게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나라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볼 기회가 있다면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계에는 우주원리가 다 담겨 있는데, 첫째는 바늘이 북극을 향해 서울의 위도만큼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두 번 째는 절기를 나타내는 선이 동지 쪽이 하지 쪽보다 촘촘하다는 걸 알 수 있지요.

a 앙부일구 해시계의 눈금의 기울기와 가로 세로 눈금의 간격을 보면 태양의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앙부일구 해시계의 눈금의 기울기와 가로 세로 눈금의 간격을 보면 태양의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여주 세종대왕릉


시헌력은 이런 태양의 움직임에 맞춰 절기를 배치합니다. 이것을 정기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그 간격이 좁고, 여름에는 길죠. 2월이 28일이 되었고,7, 8월이 31일이기 때문에, 모든 절기가 4일과 5일, 22, 23일에 올 수 있도록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와서 청나라라면 치를 떨었지만 효종은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헌력을 채택합니다. 그만큼 정확한 달력은 왕실의 절대적 요구사항이기도 했습니다.
시헌력은 1653년부터 250년간 쓰였습니다.

고종임금 때인 1896년에 비로서 근대개혁을 통해 그레고리력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 그레고리우스력의 길이와 태양의 실제 움직임과의 차이는 매년 윤초의 개념을 도입해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2006년 1월 1일에도 1초 윤초가 있었습니다.
#달력 #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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