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만 봐서는 마치 '청춘기를 이야기하는 소설' 같다.임준연
▲ 표지만 봐서는 마치 '청춘기를 이야기하는 소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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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개화기 때의 커피. 그때는 양탕국이라 하였다. 한자어로 가비. 이때 커피애호가로 유명한 고종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역사적 평가가 심하게 엇갈리는 왕이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 이후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한 것을 두고 평가가 극명하게 나뉜다.
현재와 가까우니 더 많은 사료와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혼란스러웠을 시대상황, 힘센 나라들의 간섭과 이에 의탁한 간신들의 득세, 서로 세력을 다투는 유학파와 기득권세력이 나라를 흔드는 판을 짜는 통에 나랏님도 제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땠든 자신의 처서인 궁을 버리고 남의 나라 대사관에 기거하는 왕은 처량한 존재이다. 이를 이용하려는 친러세력이 득세하고 친일세력을 처단하는 것도 수순이었다. 역사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환궁 이후엔 친러세력을 숙청해야 하는 것도 그 상황이 만드는 일. 그러다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헌납하게 되니 말이다. 역사적 논쟁으로 들어가서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거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커피다. 고종이 그렇게 커피애호가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때 즐겨 마셨던 '노서아가비', 즉 러시아 커피다.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것은 러시아대사관에서였다. 커피 맛을 처음 선보인 사람이 초대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의 처형인 안토니에트 존타크(우리 이름 손탁)였다. 커피는 곧 양반가에 양탕국으로 불리며 보급되었고 종로 등지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커피집이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음료였다.
다시, '이야기'는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이 매일 마시던 커피를 누가 끓여서 대접했는가로 향한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 이야기의 중심이다. 나는 역관 집안의 딸이다. 열여섯에 누명을 쓰고 죽은 아버지의 원한을 가슴에 묻고, 국내에서 나랏물건을 팔아먹은 집안의 천민으로 어렵게 살 것을 예견한 어머니에게 떠밀려 국외로 길을 떠난다. 이 여정의 첫걸음인 '나라의 경계' 압록강에서 처음으로 노서아가비의 맛을 느낀다. 이후 커피는 '나'의 동반자 같은 존재가 된다.
역관인 아버지 덕에 외국문물과 언어에 익숙했던 '나'는 청나라를 지나 러시아로 향하면서 영악하게 살아남는다. 단수가 높은 '사기꾼'의 눈에 띄어 그의 부속으로 일하다가 벗어나자 드넓은 러시아의 숲을 외국 귀족들에게 팔아먹는 사기단의 일원으로 동참한다. 그러다가 만난 '이반'이 인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와의 동거는 본격적인 '사기'로의 한걸음을 내딛는다. 소규모로 조직화된 사기행각은 점점 대담해지고 급기야는 조선 사절단의 진상품을 노리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조직원의 대부분을 잃고 이반과 남은 나, 이반과 약속을 떠올리며 개성으로 향했으나 이미 그곳에서도 한탕을 생각하고 있는 이반에 합류하면서 고종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미 러시아생활을 통해서 '아버지의 추억'으로 친해질 대로 친해진 커피는 사기꾼이 되어버린 자신의 가장 순수한 곳이었다. 이를 이용한 이반의 음모에 동참하면서 러시아공관에 있는 고종과 만난다.
그곳에서 커피를 끓여서 고종에게 드리는 일을 하게 된다. 커피 끓이는 사기꾼. 하지만 고종과 커피를 통해서 교감하게 된 나, '따냐'는 그 시기의 어려운 조국의 왕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반이 자신까지 속이고 있다는 의심의 실마리들을 주워 가슴에 담는다. 환궁을 앞두고 고종은 친러파들의 제거에 나선다. 그중 이반은 거제도로 망명하라는 명을 받는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이반은 벌써 몸을 피한다. 이를 따르는 사기꾼의 동행 따냐.
함께 하는 것과 의심의 깊이는 별개다. 이반과 이야기를 나누던 따냐는 이반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계획을 꾸민다는 것을 안다. 나라의 주인을 바꾸는 것. 결국 고종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드러나자 따냐는 이반과 이별하고 커피를 통해 교감했던 고종에게 달려간다. 커피를 마시는 고종에 들이닥쳐 먹은 커피까지 토하게 하는 따냐.
회궁과 투옥, 그리고 고종황제와의 재회. 붙잡힌 이반. 이반은 투옥되고 따냐는 자신의 마음의 고향 뻬쩨르부르그로 향한다. 그 곳에서 두 달,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 이반과 이야기 했던 뉴욕에서 '따냐의 문학까페'를 개업한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야기'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이백이십여 페이지를 단숨에 읽었고, 여유 있게 마시며 보려던 계획은 어디 가고 커피 한잔만 함께 했을 뿐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러시아를 넘나드는 무용담은 그렇다하고 절제된 내용과 대사는 빠른 컷의 요즘 뮤직비디오를 보듯이 장면과 시간을 뛰어 넘는다. 정작 사기의 내용 묘사나 심리의 변화, 인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없더라도 무난히 읽히는 소설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편집과 비교할 만하다.
따냐의 인생역정과 함께하는 성장과정과 그에서 느껴지는 갈등과 아픔, 이반이 가지고 있던 겉으로 드러난 꾼의 기질 내에 숨겨진 마음에 관한 묘사가 없어서 아쉬움이 든다. 귀엽고 앙증맞은 표지를 포함한 각 장마다의 커피와 관련한 그림들은 이 책이 가진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훌륭한 조력자임이 틀림없다. 책을 보면서 방금 내린 진한 커피향이 그리운 것은 나만이 아닐 듯하다.
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살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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