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좋아하는 책을, 조용히 찾고 고르고 장만하고 읽고.
최종규
'파스테르나크의 연인'이라는 작은이름이 붙어 있는 《올가 이빈스카야/신정옥 옮김-라라의 회상 (하)》(과학과인간사,1978)는 상권이 없지만, 하권만으로도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집어듭니다. 언젠가 만남끈이 닿는다면 앞엣권을 손에 쥘 수 있을 테고, 만남끈이 닿지 않는다면 하권 하나만 책꽂이에 덩그러니 꽂아 놓고 있겠지요. 어쩌면, 먼 뒷날 우리 아이가 헌책방마실을 하다가 '아빠가 못 찾은 다른 짝 하나를 내가 찾아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알아보고서는 짝을 맞출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2집, 한국어 자료집》(함경도천주교회사간행사업회,1989)을 봅니다. 함경도 천주교회 발자취를 돌아보도록 하는 자료모음인데, 백 해를 훌쩍 건너뛰면서 지난날 모습을 몇 가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1889년도 보고서] 쿠테르 신부에게는 북쪽의 함경도와 평안도 그리고 강원도의 일부까지 합하여 28개 공소가 맡겨졌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인 영세자 99명이라는 훌륭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함경도가 감동하기 시작해서 원산에서 교우들을 괴롭혔던 사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지방에 벌써 상당한 수의 숭배자를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1쪽)[뮈텔 일기 1892년 3월 21일] 3월 21일. 원산에서 우편물. 르 장드르 신부가 눈다리에서 몹시 심하게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샤르즈뵈프 신부가 그를 간호하러 가다. 3월 7일자, 11일자로 되어 있는 두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병명은 장티푸스인 듯하다. 하느님, 그를 구해 주소서! (186쪽)[가톨릭청년 제2호, 1933.7.] 덕원 신학교 수학여행. 거월 7∼8일경 덕원 신학교에서 철학생은 교장 신부 인솔 하에 금강산으로, 중등과 학생은 삼방, 고신 등지로 각각 수학여행을 무사히 하고 귀교하였다고. (242쪽)천주교회 발자취를 헤아리려는 분들한테는 틀림없이 도움이 되겠지요. 그리고, 꼭 천주교회 발자취가 아니더라도, 이 땅 이 겨레가 보내온 지난 삶자락 하나를 더듬어 보기도 합니다. 덕원 신학교라는 곳에서 수학여행으로 금강산에 갔다고 하는데, 이무렵 다른 학교에서도 으레 금강산 수학여행을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소설책 《나다니엘 호돈/박경선 옮김-일곱 박공의 집》(세계문학,1995)을 고릅니다. 호돈(호손) 문학책으로 이 작품도 옮겨진 적이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옆지기가 이 책을 좋아할 텐데, 나중에 우리 아이도 크면 아이도 좋아해 줄는지 궁금합니다.
《W.F.Davidson & R.Thomlinson-the country life picture book of Scotland》(Country Life Books,1977)는 시골살림을 담아낸 사진책입니다. 스코틀랜드 시골살림이 차분하게 담긴 사진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다가, 우리네 시골살림을 사진책으로 담아내면 어떤 모습이 될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네 사진쟁이 가운데 우리네 시골살림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담고 있는 분이 있을까요? 몇 번 마실 가듯 도시에서 시골로 떠나며 찍는 사진을 넘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가는 가운데 시골사람 살림살이와 삶터를 꾸밈없이 담아낼 만한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오늘날 세상에서는 시골살림 사진찍기는 '낡은 사진'이라거나 '덧없는 사진'이라거나 '돈 안 될 사진'으로만 여기지는 않는지요?
도시살림을 사진책으로 담아낸다면 어떻게 될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시골살림과 마찬가지로, 도시살림을 꾸밈없이 바라보거나 부대끼면서 사진으로 담는 사진쟁이는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아파트 살림이든 골목집 살림이든,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든,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담는 사진 작품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언제나 '만듦사진'뿐입니다. '꾸밈사진'뿐입니다. '겉치레사진'뿐입니다.
도시에서 살면서 세탁기로 빨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가스렌지로 불을 올려 압력밥솥으로 밥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사진쟁이는 있는지요? 밥상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뒷간에서 똥을 누는 모습을, 걸레를 빨아 마룻바닥 훔치는 모습을, 부채질을 하거나 선풍기를 틀거나 에어컨을 켜며 더위를 식히는 모습을, 또 이런저런 여느 모습을 꾸준하게 사진으로 담으며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과 자취'를 보여주는 사진은 있기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한테는 우리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는 사진책도 없지만, 우리 모습을 찬찬히 보여주는 그림책이나 글책도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국어사전이든 영어사전이든 오로지 지식으로만 다루고, 사전을 '즐겨읽'도록 엮는 매무새란 없습니다. 문학책이라고 해서, 교육책이라고 해서, 역사책이라고 해서, 철학책이라고 해서, 과학책이라고 해서, 썩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을 다루는 책을 넘어 삶을 다루는 책이 드물고, 지식을 보여주는 책을 넘어 삶을 나누는 책이 드물며, 지식으로 채우는 책을 넘어 삶을 사랑하는 마음결로 보듬으려는 책이 드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