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무효 촛불행사' 사상 가장 많은 인파인 22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지난 3월20일 광화문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내려다본 촛불문화제 전경. 광화문-서울시의회-서울시청-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촛불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탄핵무효 촛불행사' 사상 가장 많은 인파인 22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지난 3월20일 광화문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내려다본 촛불문화제 전경. 광화문-서울시의회-서울시청-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촛불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로 광장을 되찾은 대중들은 1년이 조금 지나 다시 광장에 섰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다. 2004년 3월 12일, 탄핵이 가결된 날의 여의도는 절규와 통곡과 몸부림뿐이었다. 1991년 강경대 군이 전경에 맞아 죽고 난 뒤의 분신정국 같은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대중들도 분노와 참담함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나왔다. 그런데! 먼저 나온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광장의 분위기는 영 딴 판이었다. 흥겨운 춤판이 벌어져 있고, 무대에서는 '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청춘' 같은 신나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2002년의 촛불시위 때 더 많은 인파가 모였지만,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지만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흥겨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탄핵 때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우리가 다시 찾은 광장과 인터넷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광장에서는 발랄한 보복과 유쾌한 응징이 넘쳐났다. 탄핵반대 집회는 축제였다. 다가올 총선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은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탄핵당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경찰과의 긴장도 별로 없었다. 대중들은 승리를 예매해 놓았으니 느긋했고, 경찰에 대한 지휘권은 대중들이 구하려는 참여정부에 있었으니 대중과 경찰이 충돌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대중들은 밤이 되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 느긋하게 잠을 잤다. 아직 광장은 대중들이 밤도 새고 잠도 자는 곳으로까지 진화하지는 못했다.
2008년의 촛불집회에서 대중과 광장은 정말 새롭게 거듭났다. 촛불은 처음 광장의 막내인 청계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여학생들이 청계광장에서 모이자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누구도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 명이 모였고, 모임이 발랄하고 재미있다보니 매일매일 모이게 되었고, 모이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났다. 매일 청계광장에 모이기를 17번, 집회에서 외친 구호마냥 "귓구녕에 공구리를 쳤는지" MB는 소통이 안 되었다고 사과는 해도 대화는 하려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도 17번을 얘기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그 사이는 깨지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청와대로 가자고 외쳤고, 대열은 자연스럽게 청계광장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블록 옆의 광화문 우체국 앞으로 옮겼을 뿐이다. 경찰이 막아섰는데 대중들은 그것을 돌파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대중들은 경찰저지선 앞에 주저앉았고, 집에 가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중들이 시국토론을 벌이더니 한 쪽에서는 노래자랑 모드에 들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친구들끼리 편의점에서 맥주캔 몇 개 사다가 홀짝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매연도 가라앉은 늦은 봄의 깊은 밤에 광화문 네거리에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는 상큼함이라니.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 때도, 탄핵반대 집회 때도 이 광장이 우리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광화문 네거리에 퍼질러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보니 정말 이 광장은 우리의 것이었다. 6월 10일의 촛불집회에는 아마도 광화문 네거리부터 숭례문 광장까지 사람을 가득 채우면 모두 몇 명이나 들어가는지 시험해 보기위해 마련된 집회인 것 같았다.
어떤 카메라의 어떤 앵글도 그날 모인 사람들을 다 잡아낼 수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광장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까? 통상적인 집회라면 민주노총이니 전교조니 한총련이니 하는 깃발들만 나부꼈겠지만, 이 날은 달랐다.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 당시의 깃발 논쟁이나 촛불집회 초기의 깃발 논쟁은 이미 의미를 잃은 듯싶었다.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름도 생소한 인터넷의 다양한 동호회가 저마다 자기네 깃발을 개성있게 만들어 나왔다. 깃발이라도 없다면 저 엄청난 군중 속에서 자기가 속한 동호회를 어찌 찾을 수 있을까?
시위대가 경복궁 앞까지 진출한 5월 31일 밤은 한국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아마도 사상최대의 인파가 노숙을 했던 날일 것이다. 광장이 거대한 국민MT장소로 변했다. 이제 사람들은 아예 캠핑준비를 해서 시청 앞 광장을 찾기도 했다.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토론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공연도 하고, 동영상도 돌리고, 물건도 팔고, 서명도 받고, 술도 마시고, 잠도 자고, 싸돌아다니기도 하고, 광장은 참으로 별의별 사람들이 모여 별의별 짓을 다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왜 집에 가지 않았을까? 집보다 광장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극적인 역사가 우리 자신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잘못 뽑았지만 광장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우리는 행복했다.
빼앗긴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