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이었다. 바다는 잔주름 하나 없이 평온하였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서 수면 위로 황금색 공단자락을 펼쳐놓았다. 이른 아침부터 멀리 고대구리 배 두 척이 나란히 그물을 끌고서 그 눈부신 공단 띠 속에 잠시 파묻혔다가 벗어났다.
'청산도, 여서도, 매물섬, 갈쿠도, 성주섬, 덕우도, 황제도, 삼도(거문도)…'
나는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마당 끝에 선 채로 내 바다의 섬들을 오른쪽부터 하나씩 눈길로 꼭꼭 눌러 짚어 가며 출석을 불렀다. 밤새 어디로 떠내려간 녀석도, 안개 속에 파묻혀 잠이 들어버렸거나 혹은 뒤늦게 세수를 하고서 허겁지겁 나타나는 지각생도 없이, 오늘은 섬들이 제 가끔의 자리에 모두 말끔한 모습으로 안녕하였다.
나는 큼큼큼, 서너 번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노래를 불렀다. 그 날은 음악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그 적의 우리는 국어, 산수, 사회, 자연 같은 과목의 경우 시험공부라는 것을 미리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도 언제부터 시험을 볼 터이니 공부를 해오너라, 따위의 재미없는 얘기는 미리 해주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 교과서 대신에 돌돌 만 시험지 뭉치를 가지고 교실에 들어오면 "어, 오늘 시험이네?" 하면서 후다닥 책과 공책을 집어넣고 시험을 치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시험점수가 진짜 실력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지필고사는 끝났고 실기시험이 남았는데 음악책에 나오는 동요를 잘 부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행가라면 예닐곱 곡쯤 구성지게 뽑아 젖힐 자신이 있었다. 우리가 '산토끼'나 '송아지'보다 훨씬 먼저 학습한 노래들은 남인수나 이미자의 노래들이었다.
1학년 봄 소풍 때였다. 보물을 찾은 아이들은 앞에 나가서 노래를 한 곡씩 불러야 연필이나 공책 등의 학용품과 바꿔주었는데 1학년이든 6학년이든 가림 없이 아이들은 모두 유행가를 불러 젖혔다. 5학년 정수길 형이 이미자의 '울어라 열풍아'를 기가 막히게 잘 불러서 공책 두 권을 상으로 받았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사촌인 선철이 형으로부터 배웠던 유행가를 최대한 멋을 부려서 구성지게 뽑아내었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근소근 소근대던 그 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담임인 여선생님만 빼고 선생님들도 모두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컴퍼스를 상으로 받았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의 안색이 심각했다.
"너, 국민학교 1학년짜리가 그걸 지금 노래라고 부른 거야? 뭐? 댕기 풀어 맹세를 해?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을 모지게 짓밟아? 허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지금 1학년짜리 꼬마 녀석인 네놈이, 그 노래가 무슨 노랜지 알고나 부른 거야?"
그게 무슨 노랜지 모르고 부르다니, 나는 선생님이 나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박또박 분명하게 대답해 주었다.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인디요!"
그러자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선생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를 놓아주었다.
이번에 음악 실기시험에 지정곡으로 선정된 노래는 '고향땅'이었다.
"고향따앙이 여어기이서…"
노래를 연습해볼까 했는데 너무 허기가 졌기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서 부르기로 했다.
아침밥상에 다섯 식구가 둘러앉았다.
"아무리 숭년이네 가뭄이네 해싸도 올해 맹킬로 징한 숭년은 첨 보겄다."
어머니가 풀기 없는 시선을 밥상머리에다 풀어놓고서 한숨을 푹 쉬었다. 한숨이 나오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리밥이 밥그릇에 반도 차지 않았다. 국그릇만은 풍성했는데 갯바탕에서 갈파래를 뜯어다 끓인 때문이었다. 파래로 끓인 국이나 죽이 모두 그렇게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상스럽게도 육지 작물이 흉작이면 바다에도 흉년이 들어서 갯바위에는 부드러운 파래 대신 갈파래만이 성하였다. 그것은 흡사 푸른색이 나는 두꺼운 비닐처럼 뻣뻣하고 맛도 영 맹탕이었는데 국을 끓여 담아 놓으면 그릇 위로 수북하게 부풀어 올랐다.
어머니가 식구들의 허기를 메우기 위해 준비한 또 한 가지 먹을거리가 있었다. 가사리 버무리였다. 가사리는 해초 중에서 가장 위쪽에 서식하기 때문에 바닷물이 약간만 빠져도 갯바위의 가사리밭은 금방 뻘건 바탕을 드러내었다. 따라서 사리 때가 아닌 조금에도 한 바구니쯤은 어렵지 않게 채취할 수 있었다. 그 가사리에다 밀가루를 뿌려 버무린 것이 바로 가사리 버무리였다. 뻑뻑한 고놈을 몇 움큼 집어서 입안에 우겨 넣고 나면 한나절 내내 가슴이 몹시 쓰렸다.
우리가 아직 무엇인가 아쉽고 궁금하여 숟가락을 쉬이 내려놓지 못 하고 있을 즈음, 부엌으로 갔던 어머니가 뜨물 양푼을 들고 들어왔다. 보리뜨물을 끓인 것이었다. 보리밥이 맛은 보잘 것 없어도 짓는 과정은 수월치가 않았다. 어머니는 먼동이 틀 무렵에 일어나서 겉보리를 절구에 넣고 한참이나 걸려 찧었다. 찧은 보리를 씻어 삶아서 소쿠리에 건져 두었다가, 그 삶은 보리를 다시 솥에 앉혀서 밥을 지었던 것이다. 절구에 찧은 보리를 씻을 때 나오는 뜨물은 평소에는 돼지우리의 나무밥통에다 내다 부었다.
하지만 먹을거리가 궁한 흉년이나 혹은 보릿고개 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밥을 퍼낸 솥에다 뜨물을 푸짐하게 부어넣고 숭늉 대신에 팔팔 끓여서 양푼에 담아 후식 겸하여 밥상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쌀뜨물도 아닌 보리뜨물이니 그 맛이 텁텁하고 깔깔할 것은 불문가지. 이럴 때 어머니가 부리는 요술이 있었다.
"사카린 요놈을 조깐 타놓으면 묵을 만할 것이여."
어머니가 장롱 구석에서 약 첩 같은 것을 꺼내 펼치더니 사카린 몇 알갱이를 양푼에 넣고서 휘휘 저었다. 우리는 거짓말처럼 녹아든 그 진한 단맛에 힘입어, 끓인 보리뜨물을 두어 그릇씩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다. 배가 불쑥 일어났다. 포만감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렷다!
당시 시골마을에서 사카린(사카린 나트륨)은 모든 음식에 단맛을 내는 유일한 재료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는 어머니를 졸라 보리를 볶아 먹었다. 겉보리를 사카린 탄 물에 깨작깨작 버무려서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거기 부어 볶으면 그 고소한 맛이 비할 데가 없었다. 심지어는 소 먹이러 갈 때 사카린 알갱이 몇을 싸가지고 갔다가 시퍼런 맹감(청미래) 열매를 한 움큼 따서 사카린과 함께 입안에 털어 넣고 씹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면 맹감의 텁텁한 맛을 덜 느끼고 삼킬 수 있었다.
그뿐인가? 여름철 들에서 일하고 돌아와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서 사카린을 탄 다음 한 바가지 들이켜면 꿀맛이 따로 없었다. 내가 뒷날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육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국수요리였다.
"우리 오늘은 국수 삶아 먹자."
"좋았어! 내가 요리를 하지."
나는 시골에서 하던 대로 국수를 삶아서 건진 다음 두 그릇에 나눠 담고 설탕을 한 숟갈씩 타서 내갔는데, 함께 자취를 하던 경기도 출신의 친구는 국수 맛을 보더니 기겁을 했다. 결국 녀석은 국수를 다시 빨아서 양념간장을 끼얹어 먹었다. 나는 그가 참 이상하게 보였는데 녀석 역시 나를 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 취급을 했다. 그건 그렇고.
"어어? 학교 갈 시간이 늦었는디 내 책보가 어디로 가부렀으까?"
토방마루며 방구석을 모두 뒤져봤으나 책보가 간 곳이 없었다. 동생 선길이도 모른다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엄니, 내 책보가 없어졌어!"
그런데 밥상을 내가던 어머니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엄니, 내 책보!"
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때에야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너 책보, 내가 곰체부렀다."
책보를 감춰버리다니, 그것도 어머니가…도무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내 책보를 엄니가 왜 곰체?"
"오늘 우리 밭에 보리 비는 날 아니냐."
"보리 비는 날인디 뭣이 어쨌다고…. 나 학교 가지 말고 같이 보리 비자고? 엄니! 오늘은 공일날이 아니라 수요일이여, 수요일!"
나는 책보를 내놓으라고 길길이 뛰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아버지가 나섰다.
"보리를 제 때 비어내야 그 자리에 서속도 심고 감재도 심고 할 것 아녀. 너는 우리 집의 장남이고, 보리를 비는 것은 우리 식구한테는 아주 중한 일잉께 너도 같이 보리를 비는 것이 마땅한 도리여. 그라고 선호 너는 공부를 에징간하게 하는 펜잉께 학교 하루 빠졌다고 놈들보담 뒤처지는 일은 없을 것이여. 그랑께 잔소리 말로 낫 들고 엄니 아부지 따러서 밭으로 와!"
나는 별 수 없이 낫을 들고 밭으로 향했다.
"어어? 선호 너 학교 안 가고 어디 가?"
영길이가 학교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는 분하고 억울하고 슬퍼서 울고 싶었으나, 언젠가 우윳가루 한 숟갈만 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했던 녀석에게는 시시하게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영길이 느그는 보리 안 비냐?"
"우리 집도 오늘 보리 비는디…왜?"
"장남이 돼가지고…집안에서 보리를 비는 중한 일을 하는 날 나는 몰르겄다, 하고 학교에나 가다니…비잉신 같이. 하기사 너는 공부를 못 항께 학교에 빠지면 안 될 것이여. 피잉 가보드라고."
나는 아직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영길이를 뒤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보리를 베는 작업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숫돌에 낫 가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낫질을 어떻게 해야 밑동이 뽑히지 않고 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깜부기나 귀리를 왜 먼저 뽑아내고 베어야 하는지 따위를, 평생 농사꾼을 시킬 것처럼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니, 장차 농사일 같은 것은 내게 맡기고 당신은 밖으로 나돌아 다닐 계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니, 오늘 빈 보리 집으로 갖고 갖다가 마당에서 돌깨질도 하겄제? 나도 오늘은 돌깨질을 조깐 해봐야 쓰겄어, 히히히."
나는 어느 결에 학교에 못 가게 된 서운함 따위를 잊어버리고 도리깨질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올 것 같아서 기분이 들떴다. 이전에 어른들이 하다 쉬는 틈을 타서 도리깨를 내둘러본 적이 있는데, 고놈의 도리깨가 쫙 펴져서 이삭 무더기를 때리기는커녕 늘상 직각으로 꺾어지는 바람에 땅바닥에 이마빡만 부딪치는 꼴이 되기 일쑤였다.
어른들이 이편 저 편으로 나눠 서서 으이쌰 으이쌰 장단을 맞춰가며 능숙하게 도리깨를 내리치는 모습은 구경만 하고 있어도 어깨가 들썩거렸다. 조금 잘 하는 사람은 도리깨가 한 바퀴 비잉 돌다가 땅에 내려와서야 펴져서 이삭더미를 때리는데 반해, 아주 능숙한 사람의 경우 도리깨가 하늘로 솟구친 다음에 공중에 활짝 펴진 채 일시 정지 상태로 있다가 그대로 내려와서 이삭더미를 때렸다. 나도 얼른 숙달해서 바로 그 경지에 이르고 싶었다.
"생보리에다 돌깨질을 하면 쓴다냐. 보리를 비어 갖고 일단 바닥에다 깔어서 한 이틀 몰린 다음에 묶어서 집으로 져 날러야제."
도리깨질을 해보겠다는 기대를 당장은 접어야 했다. 보리 까끄라기에 긁혀서 목이 따갑다 못 해 아파왔고 초여름 햇볕에 흐르는 진땀이 자꾸만 눈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보리 수확을 하게 되면 갈파래 국이나 가사리 버무리, 그리고 사카린을 탄 뜨물 따위를 먹지 않고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나마 참을 만했다.
"어제 결석한 사람 손들어!"
선생님이 말했다. 결석했던 아이들이 열댓 명이나 되었다. 모두들 보리 수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공부를 좀 잘 한다고 알려진, 그래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순위다툼에 신경을 쓰는, 적어도 5등 안에 든다는 아이들 중에는, 농사 일 때문에 학교를 빼먹는 경우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 부모님의 교육방식이 그들의 부모님과 다른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무척 원망스러웠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 결석하는 대신에 '식구'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족의 생계가 달린 보리 베기에 참여토록 했던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교육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셈치고 너그럽게 생각해주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자, 그럼 지금부터 어제 결석한 학생들 음악 실기 보충시험을 치르겠다. 이선호부터 나와서 '고향땅'을 부르도록. 이 노래는 어떤 마음으로 불러야 된다고 했지?"
"어른이 되어서, 어렸을 적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부르라고 그랬습니다."
"좋아."
선생님이 풍금을 쳤다. 나는 침을 두어 번 삼켜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흔 살, 아니 쉰 살이 되었다. 서러운 타향살이를 하다 보니 내가 살던 생일도 고향이 못 견디게 그리워서 지금 울고 싶다' 애써 그런 마음을 만든 다음에 노래를 시작했다.
고향 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생일도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없었으므로 내가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 저기 윗녘에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할 때 아카시아 흰 꽃을 떠올릴 일은 없겠지만 뒷산에서 들려오던 뻐꾸기 소리는 많이 그리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도 지금쯤 소오 몰고 오게엤네.
1절을 마쳤을 때 선생님이 그만 부르라고 하지 않고 반주를 계속했기 때문에 나는 2절까지 불러야 했다.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내가 생각해도 무난하게 부른 것 같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평가는 딴판이었다.
"어제 재술이, 희철이, 광남이 모두 90점을 주었다는 얘기 들었지? 이선호 너는 딴 것은 다 좋았는데 가사를 틀리게 불러서 80점 밖에 못 주겠어. 이선호, 80점!"
뜻밖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사를 잘 못 부른 대목이 없는 것 같았다.
"노래 가사 암 디도 안 틀렸는디…"
"요놈 봐라. 너 미터법을 사용해야 된다고 얘기 했어, 안 했어? 한 되는 2리터이고, 한 근은 6백 그램이라고 했지? '고향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그건 미터법에 어긋나는 가사니까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로 고쳐 부르라고, 저기 문교부에서 학교로 공문이 내려왔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선생님, 지는 그런 말씀 첨 들었습니다."
"요놈 봐라. 어제 음악 실기시험 보기 전에 가사를 바꿔 부르라고 선생님이 얘기했잖아!" "어지께 지는 결성을 했응께 오늘 시험을 보는 것인디…"
"누가 결석하라 그랬어? 출석한 놈이나 결석한 놈이나 똑같이 대접 받을 거면 뭣 하러 기를 쓰고 학교에 다니나! 결석했으면 그만큼 손해 볼 각오는 해야지! 이선호, 80점이야. 다음 사람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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