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이라는 낱말을 모르고 살던 그때는 갯벌 건너 삼각주에 '아사리'(어른 엄지손톱 크기의 노란 조개)가 지천이었다. 썰물 때는 동네 사람들이 함지박에 가득가득 잡아 수제비에 넣어 끓여 먹기도 하고, 삶아서 배고파하는 아이들 허기를 달래기도 했는데, 길가에 버린 껍질을 밟을 때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사리판'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끄러운 시장판이나 동네 사람들이 질서없이 떠들거나 싸우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는데,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아사리' 얘기만 들으면 고향동네 갯벌과 사바나의 추장처럼 얼굴에 개흙을 바르고 웃고 떠들던 옛 동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먹는 얘기가 나오니까, 홀어머니와 살던 개술이와 개화네 집에서 얻어먹었던 시래기죽이 생각난다. 미군부대 쓰레기처리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항상 두 아들이 먹을 시래기 밥 한 그릇을 솥에 남겨놓고 출근했다.
처마가 우리 키보다 약간 높아 낮에도 컴컴했던 방에서 실뜨기와 딱지치기를 하다 배고프면 물을 한 바가지 넘게 부어 끓였다. 그러면 다섯 명도 먹을 수 있는 양의 시래기죽이 되었는데, 반찬이라야 소금에 절인 시래기 김치가 전부였다. 하지만, 맛은 다시없는 별미였다.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개화도 이제는 환갑을 넘겼을 터 어디에서 그 별미를 맛볼지,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갯벌에서 놀이 삼매경에 빠지다 보면 서해바다가 붉게 물드는 것도 몰랐다. 강 건너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고 강아지 짖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는 순간, 바람이 갈대숲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스산하게 느껴지면서 집에서 기다릴 어머니가 생각나 서둘러 돌아올 때도 있었다.
중동 갯벌은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이어서 집에 올 때는 짠물에서 놀았다는 증거를 없애려고 육지와 연결된 작은 수문에서 몸의 소금기를 씻어냈다. 다 씻으면 손톱으로 상대방 팔을 긁어 확인해주었는데, 소금기가 남아 있으면 하얗게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8월의 뙤약볕이 고개를 숙이면, 김장 배추와 무를 심으려고 참외밭을 거두는데 그때도 어김없이 갯벌을 찾았다. 거두어들인 참외줄기를 퇴비에 쓰려고 옮기는 일을 돕다 보면 작지만 새빨갛게 익은 개구리참외와 수박을 먹을 수 있어서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귀담아 두었다가 찾아다니기도 했다.
군산은 해방 이후 내항에 토사가 쌓이면서 퇴보하기 시작했는데, 수수백년 전부터 쌓여왔다고 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어른들은 "이러다가 마당까지 '뻘바탕'이 될꺼여!"라며 걱정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거워했다. 아니, 집이 떠내려가든 말든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최고의 놀이터요. 여름 피서지였으니까.
문득 고향동네 사람들이 떠오르는데, 석산이, 용운이, 주태, 동구, 진걸이, 항배, 현문이, 순재, 개똥이, 희억이, 영철이, 운필이, 춘자 월순이, 난순이 등이다. 꺼꾸리, 아구, 똥꼬매, 오도바이, 이빨빠진쟁이, 떡판, 쪼새, 공달이, 뚝발이, 뚱내미 등 별명과 노부짱, 사이상, 아사꼬, 가네꼬, 다마이, 노꼬야마 등 일본식 이름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최고의 놀이터였던 갯벌은 영원한 추억이자 안식처였고, 가난에 허덕이는 우리의 희망이었다. 온갖 종기와 부스럼 딱지를 계급장처럼 붙이고 다니고, 짝도 맞지 않고 실로 꿰맨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동무들은 미래를 예상이라도 한 듯 항상 표정이 밝았는데, 조금은 짓궂었던 그 시절 놀이들은 행복한 가정을 꾸며나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8.05 13:15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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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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