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창원마을 민박집 창밖에서 밝은 달 빛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보름을 며칠 앞둔 밤이라 달빛이 참 밝았습니다. 셋째 날, 네 사람이 길 떠날 준비를 하느라 전 날 보다 시간이 두 배로 걸려 7시가 조금 넘어 길을 나섰습니다. 새벽에 경운기 소리가 들리더니 주인집 아저씨는 벌써 일을 나가고 집에 없어 인사도 못하고 그냥 왔습니다.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로 가는 길은 대체로 내리막 길입니다. 창원마을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가는 오르막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발 400m 창원마을에서 해발 280m 금계마을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내리막 길이기도하지만, 천왕봉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창원마을을 떠나 금계마을로 가는 길은 지리산을 향해 걷는 길이기 때문에 천왕봉이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까마득한 천왕봉, 눈 높이로 보며 걷는 길
전 날 오후부터 지리산 쪽을 쳐다보며 천왕봉을 살폈지만, 구름이 걷히지 않아 가끔 구름 사이로 잠깐씩 봉우리를 드러 낼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지리산을 쳐다봤더니 이젠 천왕봉이 완전히 구름에 완전히 가렸습니다. 창원마을에서 금계로 가는 길은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걷는 길입니다. 숲을 벗어날 때마다 천왕봉이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아울러 마을앞 다랭이 논 길을 따라 금계마을을 향해 걷는 길은 영화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가는 그 길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편안한 내리막 길을 걸으면 흥얼흥얼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60여 호가 사는 금계마을은 60번 지방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칠선계곡을 마주하고 있는 탓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예쁜 펜션과 민박이 많이 있습니다.
길을 건너면 의중마을이 있습니다. 추성리로 이어지는 신작로 대신에 마을 왼편 산길을 따라 '지리산길'이 이어집니다. 의중마을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습니다. 엄청난 둘레의 나무 기둥 둘레를 확인해보려고 배낭을 내려놓고 가족 4명이 손을 뻗어 마주잡아 보았습니다. 3명은 어림없었고 4명이 모두 손을 맞잡았더니 약간 여유가 남았으니 6미터는 훨씬 더 되는 듯 하였습니다.
의중마을을 지나서 벽송사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 길이 대부분입니다. 해발 320m 의중마을에서 해발 530m 벽송사에 이르는 길이니 제법 가파른 오르막도 자주 나타납니다. 첫날부터 30여km를 걷고 있는 둘째 아이는 체력이 떨어졌는지, 걷는 것이 지겨운지 자꾸만 걸음이 드디어지고 오르막만 나오면 힘들다고 짜증을 부립니다.
아이를 달래가며, 걸는 속도를 늦추고, 더 자주 쉬면서 벽송사를 향해 걸었습니다. 벽송사에 조금 못 미쳐 서암정사 입구가 나오는데, 지쳐하는 아이들 때문에 절집 구경을 포기하고 곧장 벽송사로 향하였습니다. 서암정사 입구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 산길로 벽송사를 향해가면 곧장 다시 아스팔트로 포장된 벽송사 길이 나타납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아무리 살펴봐도 아스팔트 포장된 길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벽송사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가 장난이 아닙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걸어서 벽송사에 도착하였습니다. 벽송사는 절집 보다 소나무가 참 아름답습니다.
한국전쟁무렵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벽송사는 토벌군에 의해 불타고 대부분 건물은 지어진 지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목장승과 도인송, 미인송이 벽송사의 자랑거리입니다.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있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과 소원을 이루고, 미인송의 기운를 받으면 미인이 된다고 합니다. 아울러 벽송사는 한국선불교 최고의 종가로 108명의 고승을 배출했다는 유명한 절이라고 합니다.
벽송사를 둘러보고 '지리산길 잠정폐쇄 구간' 현수막을 확인한 후 2박 3일 지리산길 걷기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혼자 길을 나섰다면 벽송사에서 공비토벌루트를 따라 올라가서 송전마을 가는 길을 찾아나섰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들과 함께 온 길이라 이번 걷기여행은 벽송사에서 정리하기로 하였습니다.
산청 수철 방면으로 지리산 길 걷기를 계속하려면, 차를 타고 함양으로 나와서 송전마을까지 버스로 이동해야 합니다. 함께 지리산길을 걷던 일행 중 여러 팀이 버스를 타고 송전마을로 이동하더군요.
아이들은 '지리산길 잠정폐쇄' 현수막을 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좋아하더군요. 힘든 걷기를 끝내고 인월로 돌아가서 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추성리를 향해 내려오다가 '서암정사'와 갈라지는 갈림길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리산길, 벽송사에서 막히다
'서암정사' 한국 불교 조각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절이라는데 입구까지 왔다가 그냥 갈 수는 없다 싶어 힘들어 하는 작은 아이를 쉼터에 남겨두고 절을 둘러보러 다시 산 길을 올라갔습니다. 과연, 서암정사 잘 꾸며진 정원과 바위벽마다 새겨진 불상들이 가득하였고, 법당은 벽과 천정에 이르기까지 온통 불상과 그림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석굴법당을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하더군요. 법당 옆에는 연못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공사가 끝나면 절집 마당이 더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뀔 것 같더군요. 길을 늦추고 서암정사를 다시 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더군요. 땅주인의 민원으로 길이 폐쇄되어 벽송사에서 길을 멈춘 것이 아쉬웠지만 지리산길 걷기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이번 일정에서 빠진 운봉 - 주천 구간, 송전 - 수철 구간도 곧 시간을 내어 걸어 볼 생각입니다. 두 곳 모두 마산에서 새벽 일찍 길을 나서기만 하면 당일 걷기 여행으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길이더군요. 2박 3일 걷기여행을 하는 동안 나름 '지리산길' 걷기의 노하우가 생긴 만큼 다음 걷기는 배낭하나만 가볍게 메고 훨씬 쉽게 길을 나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리산길, 대중교통 좀 더 개선되어야 할 듯 |
※ 참고로 벽송사에서 걷기를 마치고 자동차를 세워 둔 인월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은 매우 불편하였습니다.
①벽송사 아래 추성마을에서 일반버스를 타고 함양으로 가서, 함양에서 인월로 가는 방법
②추성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금계마을로, 금계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마천으로, 마천 다시 버스를 갈아 타고 인월로 가는 방법
저는 ②번을 선택하였는데, 불과 30분 걸리는길을 세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 가려니 참 번로롭더군요.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지점이어서 대중교통이 매우 복잡하고 불편한 것 같았습니다.
'지리산길' 걷기 여행객을 위한 대중교통 노선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구간 시작점부터 구간 마무리지점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순환버스가 하루 몇 차례라도 운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8.06 09:5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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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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