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 12회

어휴, 그 가난....(3)

등록 2009.08.11 10:01수정 2009.08.1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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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하교 길, 나는 용출리 구판장에서 석유 한 되를 사들고 집으로 향하면서 자꾸만 그 노래를 중얼거렸다. '몇 리나 되나'를 부를 때에는 고개까지 주억거리면서 '몇 리'에 무진장 힘을 주었다. 미터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 대목을 '얼마나 되나'로 바꿔 부르도록 하라는 문교부의 공문을, 하필이면 선생님이 내가 결석한 날 전달해 주는 바람에 음악 실기점수 10점을 손해 봤다 생각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랄라먼 아예 시험 못 친 아그들은 다 빵점을 줘뿔든가…'

차라리 그랬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담임이 옛날 그 여선생님만 같았더라도 몇 마디 더 항변을 했을 터인데, 후임으로 담임이 된 남자 선생님은 체구도 무척 크고 목소리도 걸걸했으며 무엇보다 인상이 무서웠으므로 말대꾸를 더 했다가는 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선생님 이마빡에 사마구나 한 번 더 물어부러라.'
그 당시 시골 아이들은 손등이며 팔꿈치 같은 곳에 유난히 사마귀를 많이 달고 다녔다. 아마도 영양결핍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왼쪽 손등에 조그만 사마귀가 둘씩이나 있었는데 자꾸만 손톱으로 짓뜯다가 피가 나서 아예 부스럼이 되기도 했다.

"사마구한테 물리면 사마구가 생긴다는 말 참말이까?"
"참말이여. 우리 함마이가 그랬어."

우리는 풀섶을 기어 다니거나 혹은 날아다니는 사마귀라는 곤충에게 물리면 그 물린 자리에 사마귀가 돋아난다고 믿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왼쪽 이마에 큼지막한 사마귀 하나가 이미 나 있었기 때문에, 오른쪽 이마를 사마귀가 한 번만 물어준다면 참 우스꽝스럽게 될 것이고, 내 시험 점수 10점을 부당하게 삭탈한 데 대한 통쾌한 복수가 될 수 있겠지만, 그 당랑거사가 내 마음을 헤아려 그렇게 해줄 리는 없을 것이었다.


"어이쿠!"
나는 음악 실기점수를 감점당한 억울함 때문에 정신을 빼놓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돌부리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고,
퍼억!
석유를 담은 됫병이 바위에 부딪쳐 박살이 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넘어지면서 팔꿈치가 바위에 부딪쳐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을 뿐 유리조각에 몸을 찔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당장 오늘 밤에 등잔에 부을 기름이 떨어졌는데 석유 한 되를 길바닥에 쏟아버렸으니 어머니 아버지의 한바탕 지청구를 각오해야만 했다. 하늘이 뱅글 돌았다. 낭패였다. 나는 뙤약볕 내리쬐는 길바닥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등굣길에 위험한 유리조각을 방치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서 서속 밭 돌담 밑으로 치웠다. 마지막으로 병모가지를 갖다 버리려다 말고 나는 노끈 손잡이가 달린 유리병 주둥이 고놈을 집에 가져가기로 했다. 그 무렵이 내가 제법 거짓말을 자주 하던 시기였으므로 석유 값을 딴 데 쓰지 않고 정말로 깨뜨렸다는 증거를 가지고 가야만 했다.


"뭣이여? 섹유 벵이 깨져서 지름 한 되를 통째로 질바닥에다 내뿌렀다고?"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듬만 정신을 어따 두고, 쯧쯧쯧."
어머니와 아버지는 석유 받아오라 했더니 달랑 유리병 모가지만 흔들거리며 나타난 내 모습에 어이가 없어 했다. 한참 동안 여러 마디의 지청구가 더 쏟아지고 나서,
"어디 다친 디는 없냐?"
한참 뒤에야 어머니가 그렇게 물었다. 사실은 그 얘기가 맨 먼저여야 했는데….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쳤다.

"이것이 다…엄니 아부지가 내 책보를 곰체불고 보리 비러 가자고 한 것 때문이었어! 공일날도 아닌디 자식을 학교에 못 가게 하는 부모가 어딨어!"
나는 눈물범벅을 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렇게 소리치고 나자마자 곧 후회했다. 그런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사실은 우리 학급에만도 열댓 명이나 되었고…무엇보다 그건 자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내친 김에 음악 실기시험에서 10점을 감점 당한 내력의 전말을 낱낱이 얘기하고서 '결석을 했으면 그 정도 손해 볼 각오는 해야 당연하다'던 담임선생님의 이야기까지 고해바쳤다.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내게 쪽지를 건네며 말했다.
"학교에 가자마자 교무실로 가서 요놈을 교장 선상님한테 갖다 디레라. 느그 담임한테 몬침 갖다 봬주면 안 된다이."
"야아."
쪽지를 받아들고 사립을 나섰다. 그런데 그 쪽지를 아버지 말대로 교장 선생님에게 갖다 주어도 괜찮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박정희-윤보선'의 선거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반골이라 불렀다. 그것이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품으로 봐서,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게 아니다 싶은 담임선생님의 음악 실기시험사건을 교장 선생님에게 보낸 쪽지에서 어떻게 얘기했을지 어렴풋이 짐작 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기름병을 깨뜨렸던 지점쯤에 이르러서 함께 등교하던 아이들 무리로부터 벗어났다. 키 작은 소나무 숲 너머로 기어들어가서 아버지의 쪽지를 펼쳤다. 송충이 한 마리가 팔뚝에 떨어졌다.
"이런 씨이!"
녀석을 털어낸 다음 난 돌멩이를 집어서 응징하였다. 토막난 송충이의 몸에서 퍼런 내장이 흘러나왔다. 아버지의 쪽지는 한문투성이였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기억을 떠올려서(내가 스무 살 무렵에 아버지에게 그 때 그 쪽지에 어떤 내용을 썼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재구성하자면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校長 先生님 貴下
오늘도 二世 敎育에 寧日이 없으신 교장 선생님께 이런 書信을 드리게 되어서 심히 遺憾입니다. 却說하옵고, 내 자식인 선호의 擔任 선생님의 反敎育的 처사를 전해 듣고 이 나라 敎育의 暗澹한 現實이 심히 염려 되어서 筆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쪽지의 내용은, 음악 실기시험에 결석한 아이들에게 추가 시험의 기회를 준 것은 당연한 조치이나 '고향땅'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를 사전에 주지시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가사 대로 불렀다 하여 감점을 한 것은 교육자로서 해서는 아니 될 행태이고, 그런 사람은 2세교육의 현장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그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한문 투의 문장 때문에 그런 내용까지는 해독할 수 없었다. 다만 한글로 썼던 이런 내용만은 기억에 삼삼하다.

-그리고 또한 '몇 리나 되나'라는 말이 메타법에 어긋난다 하여 '얼마나 되나'로 고쳐야 한다면, 아리랑 노래에서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대목은 '4 킬로메타도 못 가서 발병 난다'로 고쳐야 되는 것이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나는 아버지의 탁월한 비유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어렴풋이 짐작하기에 아버지의 쪽지 내용에는 가시가 너무 많았고, 또 그 가시가 너무 사나워보였다. 그것을 교장 선생님에게 전해 준다면 담임선생님이 겪게 될 곤란 이상으로 내가 고초를 겪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그 즈음에 벌써 나는 담인 선생님들과의 불화에 적잖게 진저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아버지의 쪽지를 다 읽고 나서 본래대로 접으려 했으나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겸사겸사해서 결론을 내렸다.

'좋아. 찢에불자고!'
나는 쪽지를 박박 찢어서는 소나무 숲을 향해 흩뿌렸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인자 나도 조깐 펜하게 살자!'

"선호야, 일남이 즈그 엄니가 펜지를 조깐 읽어주라고 갖고 왔는디…느그 아부지가 큰 동네에 가뿔고 없단 말다. 너가 조깐 읽어줘야겄다이."
팽이를 깎느라 낑낑대고 있는데 어머니가 일남이 어머니를 데리고 들어오며 말했다. 네 살짜리 꼬마 일남이도 제 어미의 손을 잡고 함께 왔다. 편지를 읽어달라는 부탁이 처음은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는 내 어머니처럼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외지에 나간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지로부터 편지가 올 경우 아예 봉투째 들고서 찾아오곤 했다. 읽어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답장을 써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한테서 왔는디라우?"
"글씨를 모르는디 누구한테서 왔는지를 어치케 알겄냐. 암만해도 군대 간 일남이 즈그 아부지한테서 왔겄제."

나는 그제서야 일남이 아버지, 김두칠이 군대에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김두칠의 군 입대를 두고 동네가 한바탕 떠들썩하였다.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군역을 피하려고 시도하였고 그것이 한 번은 성공하기도 했다. 처음엔 누군가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라 호주머니에  검은 콩을 넣고 신체검사장에 갔다가 엑스레이 촬영 직전에 그 생콩을 삼켰다고 했다. 검은콩 때문에 폐에 구멍이 난 것처럼 찍혀서 군대를 면제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소문이 났다.

그런데 몇 년 뒤, 두 번째로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나이가 서른 살이나 되었고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 두고 있는 터였으므로 그 집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는 외아들인데다 글자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똑같은 처지의 상남이라는 사람이 이태 전에 전방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두칠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손구락을 짤러부러. 오른손 검지 두 마디를 짤러불면, 소총 방아쇠를 못 댕길 것 아녀. 그런 사람은 군대에서 암 디도 쓸모가 없응께 고향 앞으로 빠꾸를 시케분당께 그래."
나름대로 경험이 있다는 사람들이 징집을 피할 수 있는 요령을 그렇게 코치하였다. 어느 날 두칠은 막걸리 두 주전자를 한꺼번에 마시고서 술김에 도끼를 들고 뒤란으로 갔으나 도저히 겁이 나서 손가락을 자르지는 못 했다. 결국 또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전혀 대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두칠, 어디 아픈 데 없지?"
군의관이 물었다. 그런데 두칠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구부린 채로,
"나는 손구락 빙신이라 군대에 가고자퍼도 못 간단 말이오. 이 손구락 시 개가 딱 굽어져서 도저히 안 피징께…"
김두칠은 군의관이 손가락을 펴려고 하자 비명을 내질렀다. 군의관이 신체검사 기록표를 들여다보고서 말했다.

"이상하네. 그런데 왜 전에 했던 신체검사 기록에는 손가락 장애가 있다는 얘기는 안 올라 있을꺄? 너, 옛날부터 손가락이 그랬어? 어려서부터 그랬냐고?"
그러자 우리의 순진한 김두칠은 문제의 손가락 셋을 활짝 펴보이며,
"옛날에는 요렇게 암시랑토 안 하게 생겠었는디 나중에 요렇게 굽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얘기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원 없이 얻어맞고 최상급인 갑종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김두칠네는 땅이 한 뙈기도 없었으므로 희철이네 집의 머슴살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가 군대에 가버리자 그의 아내와 홀어머니는 생계가 막막해졌다. 하는 수 없이 남의 밭을 매주는 등 품을 팔아서 근근이 끼니를 때웠다. 내가 보기에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 보다 가난한  몇 안 되는 집이 그 집이었다.

"뭣이라고 썼는지 조깐 읽어줘 봐라."
어머니가 일남이 어머니가 들고 있던 편지를 받아서 나에게 건넸다. 나는 '군사우편'이라는 도장이 찍힌 편지의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김두칠이는 고문관, 내 아들 일남아, 휴가 가면 건빵 줄게 울지 마. 일남아 건빵, 일남아 건빵, 일남아 건빵….

그 뒤로는 '일남아 건빵' 하는 구절만 편지지 끝까지 반복해서 적어놓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누군가 장난을 쳐놓았다고 판단하였다. 일남이 아버지 김두칠은 한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기 때문에 그 편지 또한 누군가에게 대필을 부탁했을 터인데, 부탁을 받은 그 군인이 그런 장난을 쳐놓은 것이었다.

"뭣이라고 썼냐?"
"으음, 일남이 함마이, 일남이 엄니, 그라고 일남이 다 잘 있냐고…"
"그라먼, 두칠이는 군대에서 몸 성히 잘 있다고 했냐?"
"야아, 고문관인지 뭣인지 하는 높은 벼슬도 하고…잘 있다고…"
"또 뭣이라고 쓴 것이여?"
"일남이 보고자프다고, 나중에 휴가 나올 때 건빵 많이 갖고 온다고…."
내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일남이 어머니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라고 또 뭣이라고 써놨냐?"
"잘 있냐고, 잘 있다고…맨당 그 이야기를 여러 번 적어 놨구먼이라우."
나는 진땀을 흘려가며 그렇게 대충 때워 넘겼다. 그런데 일남이 어머니는 그 편지를 나한테만 보여준 게 아니라 며칠 뒤에 희갑한테도 보여주며 읽어 달라 하였고, 희갑이가 곧이곧대로 읽어주었다. 그래서 김두칠은 뒷날 제대를 하고 나서도 사람들로부터 걸핏하면 '일남아 건빵'이라는 놀림을 받아야 했다.

우리 학교에 마술쟁이가 왔다. 강당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가장 큰 우리 교실의  책상과 걸상을 모두 복도로 빼내고 거기서 마술놀음을 선보였다. 한 남자가 유리조각이 깔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고 그의 배 위에가 작두를 올려놓더니 또 그 위에다 넓적한 돌을 올려놓고 해머로 내리쳤다. 우린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눈을 가리고 무서움에 떨었다. 다음에는 철사로 턱 밑의 목살을 꿰뚫더니 거기에다 물주전자를 달고서 한 바퀴 맴을 돌았다.
"어린이 여러분, 절대로 따라 하면 안 돼요!"

그러나 따라 해달라고 고사를 지난다 해도 그런 징그러운 짓을 따라 할 아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 다음은 국수 만드는 마술이었다. 한 남자가 신문지를 잘게 찢어서 입안에 모두 우겨넣더니 똥구멍에다 부채질을 하자 입에서 연기가 폴폴 나왔다. 부채질을 멈추고 입에서 종이테이프 같은 것을 한참 동안이나 뽑아내었고, 그것을 물이 든 대접에다 담그자 감쪽같이 국수가 되었다. 그건 따라 해보고 싶은 마술이었으나 아무래도 국수 한 그릇 먹자고 그 많은 신문지를 입안에 우겨넣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여 준 마술이야말로 나를 설레게 하였다. 화투장 크기 정도로 잘라낸 창호지를 들어 보이더니 성냥갑에서 성냥골 하나를 꺼내 불을 켰다. 그러고는 이어서 창호지에 불을 붙였다. 창호지 조각이 거지반 다 탈 즈음 마술사는 두 손 바닥으로 창호지가 탄 재를 싹싹 비볐다. 다음 순간, 그 마술사의 손에는 50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가슴이 뛰면서 등줄기로 소름 한 줄기가 쭈르르 흘러내리는 경험을 했다.
'아, 저런 방법이 있었던 것을!"
나는 어머니가 방문을 바르고 남아서 돌돌 말아 시렁에 올려놓은 창호지를 생각해냈다. 그 창호지를 가지면 50원짜리 지폐 수십 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아니 모자라면 새 창호지를 사다가 가위로 잘라서 계속 돈을 만들어내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아니 우리 집은 더 이상 가난할 필요가 없어! 얏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자, 여러분에게 재미있는 마술 한 가지를 가르쳐 줄게요. 아까 창호지를 태워서 50원짜리 돈을 만드는 걸 봤지요? 그건 어떻게 하느냐 하면, 5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이렇게 아주 작게 접어서 성냥갑 속에다 미리 감춰두는 것예요. 성냥골을 꺼낼 때 살짝 꺼내가지고 손가락 사이에 끼워뒀다가 창호지 태운 것을 비비면서 이렇게 쫙 펴들면…."
마술사가 자신이 선보였던 속임수의 내막을 우리에게 털어놓았다. 온몸에서 기운이 쪼옥 빠져 달아나 버렸다. 그가 어른이 아니고 아이라면 쫓아가서 꿀밤을 한 방 야무지게 먹여주고 싶었다. 
#석유 등잔 # 건빵 #마술사 # 군대 기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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