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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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직후 25세 청년 신규식은 종로에서 이상설의 가두연설을 듣고 왔다. 그는 충정공 민영환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을 처절히 읽고 나서, 독약 아고니친을 성큼 입에 넣었다. 그는 민충정공을 따라 순국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인 조정완의 슬기로운 구급으로 목숨을 건진다.
다만 약발이 시신경을 건드려 사시(斜視)가 되고 만다. 사시를 우리말로 하면 '흘겨보기'가 된다. 그리고 흘겨보기를 다른 한자어로 바꾸면 '예관(睨觀)'이 된다. 그날로부터 신규식은 자기의 호를 예관으로 정해 썼다. 예관 신규식, 그는 처참히 망해 버린 조국을 정시하기가 싫어 사시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충청도 문의에서 태어난 신규식(1879~1922)은 문무를 겸비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와 경사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문과 무가 함께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을사늑약 후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끝내 경술국치로 나라가 결딴나자 분연히 총을 들고 서소문으로 나가 구식군대의 봉기에 가담했다. 그의 옆에는 훗날 독립군 장군이 되는 노백린이 있었다.
의병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그의 슬픔은 깊어만 갔다. 남편이 또다시 자살할 것이 두려워진 아내 조정완은 친정에 가서 아버지와 담판하여 자금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양 조씨 종손이자 경기도 부호였다.
그 해 꽃잎에 흙먼지가 이는 봄날, 신규식을 태운 준마는 북으로 달린다. 그의 말에는 지금 환산으로 무려 13억원의 현금 자루가 실려 있었다. 그가 말에서 내린 곳은 중국 땅 단동이 바라보이는 신의주였다. 그의 아이디어에는 상해가 박혀 있었다.
기차와 배를 번갈아 타며 상해 진입에 성공한 그는 가져간 돈의 절반을 손문의 혁명대에 과감히 '배팅'했다. 이후 그는 손문은 물론 중국 굴지의 혁명가들인 황홍, 송교인, 진기미, 당계요 등과 우호를 돈독히 했다. 그는 상해에 박달학원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조선 청년 100명을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한 신규식신규식은 1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을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했다. 이어서 그는 '동제사'를 결성했다. 동제사란 '물을 함께 건너자'는 뜻의 이름이다. 바로 이 동제사가 없었더라면 몇 해 후 임시정부가 조직되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요컨대 신규식이 만든 동제사는 오늘날 우리가 훈장처럼 여기는 상해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조직이었다.
신규식의 집은 독립투사들의 기숙사나 다름없었다. 박은식, 신채호 등의 기라성들이 그의 집에 기식하며 적지 않은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마침내 그는 대망의 임시정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일체의 보직을 사양했다. 그 전에 간도의 거목 이상설과 제휴하여 당을 만들었을 때에도 상해 지부장 외의 모든 요직을 다 양보했던 적이 있었다.
신규식은 명저 <한국혼>을 저술했다. 이 원고는 상해 유수 출판사에서 자원 출간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예관은 손문과 필적하는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유감스럽게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직무유기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나타난 임시정부의 분열은 그에게 신경쇠약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방기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리면서 신규식에게 전권을 맡겼다. 사실 애초부터 신규식이 맡았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법무장관 직을 받아, 거덜 난 임시정부를 수습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는 박찬익, 민필호 등을 대동하여 손문의 광동정부를 방문했다. 손문은 신규식을 환대하면서 임시정부를 비록 약식이지만 승인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이루어 낸 전무후무한 외교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파리강회회의 진입 실패로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이 다시 도지게 된다. 임시정부가 와해 위기에 빠지자 신규식은 매일 밤 통곡으로 지새웠다. 그는 잘 우는 기질과 약간 염세적인 세계관을 타고난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해 주던 손문의 광동정부가 진형명의 반란으로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자 그의 좌절은 더욱 깊어져 갔다.
신용우-신규식-민필호-김준엽... 4대에 걸친 독립운동그는 갑자기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음 전폐 후 며칠 후부터 유령 같은 헛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을 보고 누군가를 탓하고도 싶었겠지만, 그는 생전 그것을 안으로 삼키며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로 대신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로부터 그가 허락한 것은 물 몇 모금뿐이었다. 이후 그는 보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정부, 정부"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고는 영구히 잠들어 버렸다. 그 비명은 너무도 모호해서 아무도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그의 부친 신용우 공은 정2품 의금부도사였는데 나라가 망하자 홀연히 의병장으로 나선 인물이다. 신규식의 동생 건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으며, 신규식의 조카 신필호는 국내에서 세브란스 의사를 하며 독립운동가를 은신시키고 자금 등을 지원했다.
신규식에게는 외동딸 명호가 있었는데 훗날 이 소녀와 결혼한 사람이 민필호이다. 신규식의 사위가 된 민필호는 나중에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을 맡는다. 민필호는 중국군 고급장교 신분을 유지하며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을 도맡기도 했다. 그는 중경으로 쫓겨 간 임시정부의 청사를 마련했으며 해방 후까지 임시정부를 지켰다.
민필호에게도 딸이 생겼다. 딸의 이름은 민영주였는데 그녀는 독립군 지대장 이범석의 비서를 하다가, 학병에서 탈출하여 중경임시정부를 찾아온 청년 김준엽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신용우 - 신규식 부자(父子),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 그리고 민필호의 사위 김준엽, 이렇게 4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예는 세계 역사에도 없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독립운동가의 등급을 운운하는 것이 경망해 보일 것 같아 조심스럽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5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지금까지 1등급인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인물은 27명인데 그 중에는 이승만 서재필 임병직 등 독립운동과 거의 관계가 없거나 아주 작은 활동밖에는 하지 않은 인물이 들어 있다. 이상설과 신규식은 2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장 서훈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한편 이상설은 사후 84년인 2001년에야 러시아 수이픈강에 유허비가 세워졌고 신규식의 유해는 사후 74년인 1996년에야 고국으로 이장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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