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1년 반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그동안의 모든 일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게, 불과 세 달 사이에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 아니겠나. 참 가혹하고 혹독한 시대다."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으나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정연주 전 KBS 사장이 1년 만에 입을 열었다. 정 전 사장은 KBS에서 강제로 '쫓겨난' 이후 공개적 발언을 자제해왔다. 오랜만에 입을 연 정 전 사장의 첫 일성은 위와 같은 탄식이었다.
정 전 사장의 '컴백 무대'는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는 화려한 기자회견장이 아니었다. 이른바 '1류 대학'의 초청 강연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난 21일부터 23일 오전까지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 진행된 '오연호의 기자만들기' 30기 교육 현장이 그의 복귀 무대였다.
'오연호의 기자만들기'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진행하는, 기자 지망생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다. 정 전 사장은 이곳에서 '시대정신과 언론인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22일 오후 강연을 진행했다. 그의 강연을 들은 수강생 22명 대부분은 기자를 꿈꾸는 20대 초반의 대학생들.
눈부신 카메라 세례와 대단한 석학이 없어도 좋았다. 정 전 사장은 "평생을 언론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다시 사회적 발언을 한다면, 어떤 자리든 언론과 관계가 있는 현장이었으면 했다"며 많게는 40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들에게 수첩에 적어온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냈다.
이날 정 전 사장은 '역사의 역류'를 강하게 지적했다.
정 전 사장은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다 이뤄진 줄 알았기 때문에, KBS 사장이었던 내가 그렇게 해임되거나 잡혀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하지만 미네르바, <PD수첩> 사태 등을 보면서 역사의 역류를 절절히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재판을 준비하면서 역사 관련 서적을 많이 탐독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정 전 사장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더욱 확신한 듯했다.
그는 "인류 역사와 한국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역사 발전의 밑바닥에는 늘 도도한 흐름이나 정신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정 전 사장은 "세상은 지금까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나아갔고, 획일적인 것이 다양성 지향으로 바뀌었으며, 타율에서 자율적인 것으로 발전했다"고 강조했다.
"역사의 흐름 계속 거부하면 정권 담당자들 비참해질 것"
정 전 사장은 "이런 (역사적) 관점을 갖고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의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각 영역에서 어떤 역류현상이 발생했는지 공부를 해보라, 그러면 책 몇 권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현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연주라는 사람을 검찰, 국세청, 감사원, 방통위 등 온갖 권력기관을 총 동원해 쫓아내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라. 역사의 역류는 결국 되돌아가는 것이고 진보의 발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지금의 흐름은 시대의 흐름과 어긋나기 때문에 오래 가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지그재그로 오늘까지 왔지만 그 과정에서 발전하고 진보했다고 확신한다. 나는 역사의 낙관을 한 번도 버려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정 전 사장은 "역사의 역류 현상에서 벗어나면 우리 사회도 발전할 것이고, 정권을 담당한 사람들도 역사에 기여를 할 것이다"며 "만약 그렇지 않고 계속 거꾸로 흐름에 몸을 담고 있으면 사회와 역사는 물론 정권 담당자들에게도 비극이 될"이라고 경고했다.
또 정 전 사장은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지성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지성인으로서 책임있는 일과 성취를 바란다면 자유, 인권, 평화, 평등, 정의, 생명 등의 가치를 가슴 한 가운데 두고 있어야 한다"며 "그러면 기사를 쓸 때 충분한 반론권을 줄 수 있고, 진실 보도를 하게 되며, 언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는 게 좋은지 답이 다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전 사장은 학생들에게 "오늘날의 언론인은 '프로페셔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연주가 말하는 '컵라면 저널리스트'
"철저한 프로는 어느 것에 의해서도 자신의 양심이나, 자유의지를 지배당하지 않는다. 사주, 자본의 영향력에 지배받지 않고, 언론인의 기본자세에 충실한 진정한 프로가 돼야 한다. 요즘처럼 언론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겨레> 논설위원과 KBS 사장까지 지낸 '베테랑 언론인' 정연주가 언론인 지망생들에게 강조한 건 토익과 상식, 그리고 논술 시험 등의 중요성이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주문했다.
정 전 사장은 "제도권 매체에 들어가 그 매체의 영향력을 활용하고 경제적 보상을 받는 것도 좋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1인 미디어 등 전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컵라면 저널리스트'로 압축해 표현했다.
"좀 배가 고프지만 인터넷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에서 개인의 꿈을 실현하고 미디어로서 적극적 역할을 하는 건 어떤가. 지금 우리나라처럼 제도권 언론이 (보수)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수많은 게릴라 미디어가 필요하다."
이어 그는 미국 <애플>의 대표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을 인용해 "허허벌판에서 젊은이다운 도전을 해보라"며 "너무 영악하지 말고, 너무 물질적으로 가지 말고, 바보 소리 듣더라도 진정한 꿈을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하라"고 당부했다.
한편 그는 우리 사회 '진보의 재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어설픈 화해와 통합론에 대한 경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역사의 낙관 믿는 정연주의 웃음 "이런 세상 오래 가겠나"
정 전 사장은 "진정한 소통과 화해와 통합을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쪽이 다른 쪽을) 가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본다"며 "박정희나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처럼, 생각이 다르고 자신을 비판한다고 국가 권력을 동원해서 구속하고, 일자리를 빼앗는 등의 가해 행위를 한다면 소통이나 화해, 통합은 근원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날 강연에서 정 전 사장은 우리 사회의 퇴행을 지적하며 많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런 정 전 사장에게 한 학생이 최근 벌어진 '퇴행적 사건'에 대해서 물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재임용 탈락에 대한 견해를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역류한다는 걸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다. 정권의 이해관계와 다르다고 박해를 받는 건 성숙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현상이다. 하나의 의견만을 강요하는 경직된 사회로 가는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 순간, 정 전 사장은 웃었다. 경직된 사회가 즐거워서가 아니다.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을 한 번도 버린 적 없다는 그는 이런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런 세상이 오래 가겠습니까? 절대 오래 못 갑니다."
2009.08.25 08:19 | ⓒ 2009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공유하기
"석달동안 두 전직 대통령 떠난 참혹한 시대 하지만 '역사의 역류'는 오래 가지 못한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