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고분 평면도.발굴조사 때 조사된 고분의 모습을 실측한 도면.
부경대학교박물관
이 백운대고분은 횡혈식석실묘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무덤의 구역을 표시하였다. 이때 호석을 2줄로 둘렀는데, 안쪽의 호석은 주석실과 부장석곽 1기를 감싸고 있으며, 바깥쪽의 호석은 부장석곽 1기를 감싸고 있다.
부장석곽이라는 것은 피장자, 즉 무덤의 주인이 쓰던 물건들이나 저승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따로 보관하는 유구이다. 이러한 물건들을 흔히 부장품, 혹은 껴묻거리라고 하는데 가야에서는 이렇게 무덤 외에 따로 보관을 하는 부곽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도 부장석곽이라는 존재는 이 백운대 고분이 대표적이다.
유물들은 총 58점이 발견되어 도굴된 고분 치고는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주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토기로서 총 44점이 발견되었다. 토기들의 양식을 따져 보았을 때 6세기 후기나 말엽 정도의 유물로 보인다. 또한 무기나 농공구가 포함된 철기가 11점, 금동제 장신구가 3점이 발견되었다.
가야 고도를 신라 무덤이 바라보는 이유는?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고분의 주인은 신라인이다. 하지만 완전한 신라인이라고 보기엔 가야적인 색채가 더러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덤의 주인을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그리고 신라의 신하로서 당시의 김해를 다스린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금관가야는 대가야와는 달리 신라에게 항복함으로써 나라를 바쳤다. 그래서 금관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인정되었으며, 또한 신라의 정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무력이나 김서현, 김유신과 같은 인물이다. 최근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서현과 김유신이 등장하는데,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뻘 되는 인물이다.
이 백운대고분의 주인 또한 김무력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추측된다. 김무력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신라 정계에 진출하여 관산성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 입지를 다졌지만, 이 무덤의 주인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김해의 땅을 다스리면서 살았으리라.
백운대고분의 입지는 그야말로 김해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다. 등 뒤로는 가야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진 분산성이 있으며 가까이에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이 있다. 그리고 대성동고분군이나 수로왕릉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추측컨대 사후에 자신이 다스리던 가야의 땅을 죽어서까지 내내 보고 싶었기에 일부러 백운대에 무덤을 써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단독분, 즉 홀로 있는 무덤은 그에 대한 세력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피장자의 요청에 의하여 일부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무덤 또한 후자의 경우로 생각하여 죽어서도 가야의 땅을 바라보고, 또한 가야를 위해 살던 자신을 위안하고자 이곳에 무덤을 쓴 게 아닐까? 젊은 날 이 백운대에 올라 가야를 바라보던 망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덧붙이는 글 | 구산동고분군 중 주로 백운대고분을 답사한 내용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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