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정래씨의 브로마이드가 태백산맥 문학관 유리벽에 걸려있다
서정일
태백산맥문학관은 지난 2008년 말에 개관했다. 필자는 가볍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입구에서 A씨에게 "태백산맥문학관이 왜 벌교에 세워졌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소설의 주 무대가 벌교이기 때문에 벌교에 세운 것 아니겠냐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A씨는 "그렇죠? 서울에 세워졌어야 하는데"라고 의외의 답변을 했다.
이어, 그가 "소설가 조정래씨가 10년 넘게 국가보안법으로 고생한 것의 시작과 끝이 벌교에 있다"는 얘기를 끄집어낼 때 왜 태백산맥문학관이 서울에 세워졌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A씨는 만약 기사로 쓴다면 자신은 익명으로 해 달라는 요구도 해왔다. 물론 이름을 알리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어도 필자는 그를 익명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지역정세를 필자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을 때 엉뚱하게도 한국 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지 말라고 탄원서를 제출해 심사위원들이 황당해 했다죠? 그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국가 보안법 시비는 벌교에서부터 시작됐지요."
무슨 얘기가 진행될지 어렴풋하게 감을 잡았다. 소설 태백산맥이 지난 1948년에 일어났던 여순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 배경을 벌교로 잡아 좌익과 우익간의 치열한 사상전쟁의 참상을 소설화한 작품인데 그 사실성이 너무나 적나라해 출간 이후 문제 아닌 문제로 불거지게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싶었다.
하나,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을 품어 안을 수 있을까?
▲소설가 조정래씨와 소설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으로 부터 자유로워진 피의사건 처분결과 통지서
서정일
"여수나 순천 등지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 벌교도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인민군이 지역을 장악하고 수없는 살상을 계속했기에 지금 살아 있다는 사람들은 당시 어떻게 목숨을 부지했는지 모두가 아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는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꽉 다물고 있지요."
입을 꽉 다물고 있다는 A씨의 표현은 어찌 보면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보였다.
"그런데 소설가 조정래씨는 벌교민들이 죽는 날까지 무덤에 가지고 가겠다고 다물어 버린 입 속에서 실을 뽑아내듯 50여 년 전 그날의 일들을 하나하나 뽑아내 들실 날실로 엮어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써냈는데 '우익에서 보면 좌익편이요, 좌익에서 보면 우익편'의 글을 써내고 말았습니다."
'우익에서 보면 좌익편이요, 좌익에서 보면 우익편'이라는 표현도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며 충격적 평가였다. 좀 더 설명을 들어보기 위해 귀를 기울이니 "아 그거 있잖아요. 쌈(싸움)한 사람들 보면 무조건 내가 더 맞았다 내가 더 맞았다고 우기잖습니까"라고 얼버무리는데 그 또한 일리가 있어 보였다.
아무튼 그 중에서 소설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측이 소설가 조정래씨와 소설 태백산맥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어 이적성 논란이 본격화 됐다는 얘기다. 그리고 해금이 되고 문학관까지 설립된 지금도 그들은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고 귀띔하면서 "사정이 이런데 벌교에 굳이 세울 필요가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하나, 벌교는 태백산맥문학관을 보전 관리할 수 있는가?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조정래씨의 작품은 물론 소설을 쓰는 과정과 이후의 것들이 전부 전시돼 있다
서정일
A씨는 "문학관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곳으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이란 곧 작가의 생각과 사상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아마도 작가는 "분단의 아픔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치유하자'는 주장을 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또다시 "서울에 문학관이 있었어야 했다"고 재차 강조하는데 '남한 인구의 1/4이 서울에 있고, 그들 대부분은 여순사건의 직접적 당사자들이 아니기에 충분히 객관적일 수 있고, 작가의 생각과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강연이 필수적인데 맘만 먹으면 수시로 할 수 있기에 그곳에 위치했어야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살리자면 "툭 까놓고 얘기하면 이곳 사람들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보다, 어떻게 화해하고 치유하느냐보다, 문학관이 들어서면 어떻게 지역경제가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나 소설 태백산맥 덕으로 꼬막이나 더 팔아볼까 하는 측이 훨씬 더 많지,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하는 측은 내가 볼 때 별로 없다"고 잘라 말했다.
A씨는 "벌교 내부의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문학관이 보전(온전하게 보호하여 유지함) 되고 관리될 수 있겠냐"고 동시에 지적했다. 물론 10여 년 넘게 개인 사비를 들여 소설 태백산맥을 알리고 작가의 생각과 사상을 전파하려 했던 마니아와 단체가 이곳 벌교에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의 지적처럼 그들은 소수이며 대다수는 생각이 가지각색이라는 것이다.
지역민의 사랑 없이는 결코 자랄 수 없는 태백산맥문학관
▲태백산맥 문학관 전망대에서 바라 본 벌교읍 전경
서정일
그와의 얘기는 그것으로 마무리됐다. 공감할 수 있는 얘기도 있고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지역민들 마음 속에서부터 나온 현장의 목소리라는 생각으로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돼 지면을 할애했다.
종합해 보면, 남한 인구 1/4인 약 1천만 명 이상이 살고 있는 서울은 여순사건에서 비교적 객관적이어서 강연 등을 통해 작가의 생각과 사상을 전파하기 쉽지만 그에 비하면 서울과 4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인구도 고작 만 오천 명 정도에 불과한 벌교는 사건 발생지인 관계로 편향적 시각에 의해 외면 받을 수 있고 더구나 지역민들의 관심도 경제적인 손익에 머무르는 수준이라면 태백산맥문학관의 미래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태백산맥문학관은 벌교에 세워졌을까? "그저 소설의 태생지가 벌교라는 것만으로 세워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더구나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거나 꼬막이 잘 팔릴 수 있게 하기 위해 개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는 A씨의 지적.
적어도 우익이든 좌익이든 모두가 역사의 희생자였기에 동등한 위치에 놓고 벌교민들의 위상을 바로 세워주기 위함이고 그것을 계기로 서로 화합해 통일의 물꼬를 트는 선구자의 역할을 벌교민들이 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앞으로 태백산맥문학관의 운명은 닫혀 있는 마음을 열고 애정을 갖는 지역민의 사랑에 달려 있는데 얄팍한 사랑이 아닌, 진실된 사랑만이 문학관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지역을 살리게 될 것"이라는 A씨의 지적을 벌교민들은 깊이 되새겨봐야 할 듯하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
덧붙이는 글 | 예고: [09-034] 수석으로 유명한 제석산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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