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된 마을의 모정에서 용기를 앞세우고 '술멕이기'의 출발을 준비하는 모습모정(정자의 전라도 사투리)에서 음식을 나누며 흥을 돋우고 훈련받은 전문기수만이 다룰 수 있는 커다란 용기를 앞세우고 출발을 준비하는 단원들
서치식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도시 전주에서 금산사로 가는 길 어귀에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기 전 오른쪽으로 야트막해서 정겹게 보이는 산이 계룡산이다. 그 계룡산이 띠처럼 감싸고 있는 마을이 함대마을(함띠마을 이라고도 한다)이다.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의 밀집된 아파트 숲을 지나 다리를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거슬러 온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전주 기접놀이"의 고장으로 수백년에 걸쳐 그 원형이 보전되며 대를 이어 전수되고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현재 전주시 삼천2동이지만 바로 마을 앞 다리 건너 아파트촌과는 전혀 다르게 농촌문화를 지니고 생활하고 있다.
우리의 농경문화에서는 음력 백중이 되면 바쁜 농사일이 한 고비를 넘기게 된다. 농사에 지친 심신을 달래며 농사일로 갈등을 겪던 이웃들과도 앙금을 푸는 한바탕 놀이마당이 벌어지는데 그것을 '마을굿' 또는 '술멕이', '호미씻이 '로 불렀으며 농악을 앞세우고 마을 집집을 돌며, 집집마다 술과 음식을 내어 한바탕 어울림의 마당이 벌어지는 것이다. 논농사 위주의 옛날에 있었던 민속을 그것도 대규모 아파트 촌을 세내라는 천을 사이에 한 70여호의 주민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지금껏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전주시삼천동2가의 자연부락인 비아․정동․용산함대마을의 지역토착민들을 중심으로 1998년 "전주기접놀이 보존회"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다. 특히 2005년에는 제46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전라북도 대표로 참가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 제48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은상을 수상 하는 등 그 민속적 가치를 인정받아 농업진흥청과 전주시지정0000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심영배 보존회장은 말했다.
마을합굿을 위해 모이기로 했다는 마을 가운데에 있는 모정(정자의 전라도 사투리)에 약속 시간 30분 전인 2시30분에 가니 벌써 부지런한 마을 어르신들과 심영배전주기접놀이 보존회장(56세, 전주시 삼천동)이 흥을 돋우기 위해 풍장을 치고 있었다. 심영배 보존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간이 되어 가면서 복장을 하고 나오시는 분들이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시며 하나둘 나오시는데 '일상'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우리 고유의 민속이라도 이젠 정형화 된 '공연'으로밖에 접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런 자연스러운 몸짓은 신섬함으로 다가왔다. 좀 떨어진 마을회관에서 마을 부녀회원들이 연신 음식을 준비해 나르면서 분위기는 가파르게 흥이 오르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간단하게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 자체가 정이 흐르며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는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이 있었다. 마을의 원로이시며 기접놀이의 상쇠이셨던 심동섭(88, 전주시 삼천동) 어르신이 예전의 기접놀이와 마을굿에 대해 말씀 하시며 이런 전통이 계승되고 있음이 자랑스러우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보니 마을 합굿에 참여하는 단원들 중 젊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고성능의 카메라로 연신 촬영을 하고 또 다른 단원은 캠코더로 능숙하게 동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누구라고 할것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음식과 술을 나누며 간단하게 회의를 마치자 각자 차비를 차리는데, 누가 준비하자고 큰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그저 각자 알아서들 조용히 준비하면서 꽹과리가 장단을 시작하자 거대한 '용기'가 앞장을 서는 모습이 그저 자연스러운 '생활'이었다. 기접놀이는 패를 나누어 큰 기인 '용기'를 앞세우는데 그 크기가 거대해 훈련받지 않은 기수는 다룰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기접놀이의 고장답게 모든 농악에는 '용기'가 앞장을 서는 게 이 마을의 전통이라 한다.
커다란 장대에 큼지막하게 매달린 용기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마을 농악단이 뒤따르며 함대리 합굿은 시작됐다. 원래는 마을의 집집마다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돌았고, 각 집에서 형편에 맞게 음식을 내어놓아 흥을 돋았다고 하나 지금은 이 동네도 전업농이 드물고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하는 집이 많아 오늘은 두 집만 돌고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겸한 뒤풀이 자리를 가진다고 한다.
모든 산의 어머니란 의미인 모악산 자락의 계룡산鷄龍山밑에 옹기종기 자리한 비아ㆍ정동ㆍ용산ㆍ함대 마을에서 1956년까지 실제로 전래되다가 그 맥이 끊겼다고 한다. 5.16혁명이 나고 개발의 광풍이 불어닥치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는 진부하고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으며, 6,70년대에는 농악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문화가 문화 자체로 계승 발전되기보다는 독재 권력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의 성격을 띠며 발달해 '전주기접놀이'같은 한 동네의 자생적인 민속은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