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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3일은 토요일이었다. 부모님과 여동생 모두 집에 없어 한적하고 우울한 주말이었을 게다. 소파에 누워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텔레비전을 보거나 서재에 있는 책 몇 권을 꺼내 뒤적거리고 있었겠지. 날은 어둡고 밖은 모두 주말을 즐기기라도 하는 건지,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을 테고. 대학원을 다니던 나는 어쩌면 다음 주 수업 과제나 앞으로의 막막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한숨과 함께 대기에 털어놓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간에 그 날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왕따 당하던 중학교 때, 구타와 폭력에 시달렸던 군대 시절에 나는 수도 없이 자살을 꿈꾸었지만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어떤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그건 살고 싶다는 일종의 신호였을 것이다. 일기장에 써놓은 고백 때문에 부모님을 학교로 가게 만든 것도, 원으로 둘러싼 선임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다가 제발 살려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뜻이었겠지.
늦은 밤에 부모님이 돌아와 거실을 점령했고, 언제나 그렇듯 방안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그 때 울린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면 해야 할 일을 모두 일요일로 미루고 자려고 하진 않았을까. 어머니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나를 불렀다. 우린 모두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세웠다.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눈에서는 벌써부터 눈물이 흘러내렸다. 밤 열 시가 넘은 토요일의 밤거리를 달려 대학로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몇 분의 친지와 친척동생들이 와 있었다.
2006년 5월 14일 새벽 2시 50분 - 그 언저리의 기억
그리고 거기에 삼촌이 누워있었다. 산처럼 솟아오른 시꺼먼 배, 초점 없는 희미한 눈동자, 갈 길 잃고 헤매는 정신. 산소호흡기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고모가 방금 전 아버지에게 전화 걸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오늘 넘기기 힘들대. 동생 임종이라도 봐야지, 오빠."
옆구리에 수도 없이 구멍을 뚫고,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어머니가 안타까워했다. 부모님은 일주일 전에 갑자기 삼촌이 입원을 하면서 두어 번 병문안 간 적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몇 달은 살 수 있을 거라고 병원에서 말했기 때문에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원한 후, 삼촌은 불과 일주일 만에 생사를 오가는 신세가 되었다.
"윤영아, 삼촌이 너 보고 싶대."
가야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면서 나는 병문안 가는 시간을 며칠 뒤로 미뤘다. 귀찮았을 게다. 밖에 돌아다니거나 누군가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게다가 아직 몇 달의 여유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지는 말자고 생각했는지 모르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들이 병원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여동생도 급히 병실로 와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의사는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더 이상 산소호흡기가 소용없다고 말했다. 간신히 몇 시간 연장만 시켜줄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최소한 어머니가 임종은 봐야하지 않느냐며 시간을 좀 더 끌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주말마다 가정부 일을 했던 할매는 휴대폰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연락할 길이 없었다.
삼촌은 몇 번이나 구토를 해댔고 그 때마다 두 명의 간호사는 그걸 닦아냈다. 그들은 아주 평온하고 일상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점심에 무얼 먹었고 어디가 그렇게 맛있었다고. 난 삼촌의 시꺼먼 손을 꼭 잡고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다리가 저절로 떨리는 게 어떤 것인지 그 때 처음으로 느꼈다. 기도하고 또 애원했지만 삼촌의 숨은 점점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게 느껴졌다. 예정된 슬픔을 앞에 두고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서러웠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가자 담당의사는 아버지에게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얼핏 훔쳐본 그 종이에는 산소호흡기 포기동의서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서명을 했고, 이윽고 의사는 산소호흡기를 삼촌에게서 떼어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직한 목소리로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했다.
노진원씨가 2006년 5월 14일 새벽 2시 50분에 사망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의사는 주변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을 떠났다. 할매는 삼촌의 몸이 영안실로 간 후에야 연락을 받고 왔다. 아이고, 우리 아들. 늦은 새벽이 떠나가라 할매는 울고 또 울었다. 평생 가난에 찌들어 자식들에게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인 게 한이었다는 할매는 그렇게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위암말기 판정 받고도 트럭 직접 몰고 병원 간 삼촌
의사의 공표 당시에 몇몇은 울고 몇몇은 쓰러지고, 또한 누군가는 가만히 삼촌을 바라보았다. 난 그 중 세 번째였다. 3인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누군가가 코를 골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제발 이제 그만 죽고 싶다고 말했다는 삼촌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삼촌이 코를 골며 신나게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삼촌은 진작 몇 년 전에 건강 검진을 통해 자신의 위암 사실을 알았지만, 돈이 없었기 때문에 터벅터벅 일터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국졸 출신으로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조차 없던 삼촌은 평생을 공사판에서 일했고 쉬는 날이면 어린 나를 업고 만화방에 가는 날이 많았다. 말도 더듬었고 어떨 때는 바보 같아 보였지만 항상 순박하고 착했다.
"유유윤영아, 내내내가 나중에 마마맛있는 거 마마마마니 사줄게."
삼촌은 항상 나만 보면 무언가를 주고 또한 먹이고 싶어 했다. 헝클어진 머리, 먼지와 시멘트 자국으로 가득한 옷차림, 1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키의 삼촌은 언제나 웃으며 당당하게 일했다.
병원에 입원하던 날도 역시 그랬다. 돈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 수술시기를 놓쳤고, 결국 삼촌은 크게 부어오른 배를 핸들에 기대며 직접 트럭을 운전해 병원에 갔다. 상상이 안 간다. 불과 일주일 후에 세상을 떠날 사람이 그 가득 부어오른 배를 힘겹게 이끌고서 1톤 트럭을 운전해 병원에 갔다니.
삼촌은 가족과 함께 남들 부럽지 않은 멋진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했다. 결국 그 소원은 반쪽짜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사실상 살 수 없다는 판정을 들은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털어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아파트를 선물했다. 기적을 바랐지만 위암 말기라는 잔혹한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 깊은 어둠의 핵심은 언제나 삼촌의 눈과 마주했을 것이다.
나도 울고 아버지도 울었다. 아버지는 도와주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아마 아버지에게는 그게 한이 됐을지 모른다. 장례를 치르고 장지까지 다녀온 후에 집으로 돌아가니 더 이상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창밖으로 대문 옆에 있는 한 평 정도의 화단이 보였다. 그 곳에 유독 높게 솟아오른 풀 한 포기. 몇 달 전 삼촌이 우리 집으로 보낸 선물이었다. 유독 푸르던 풀 한 포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풀을 보면서 나는 한참동안이나 숨죽여 울었다. 눈물샘이 좀처럼 마를 줄을 몰랐다. 5월의 평일, 나른한 오후의 한가운데였다. 높이 솟아오른 햇살이 정신없이 내게 쏟아졌지만, 마음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난생 처음 두 눈으로 죽음을 목격했던 그 때.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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