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속에 방랑하다 배에서 생을 마친 두보

[3일간의 중국 도시기행 4] 청두(成都) 둘째날 오후: 두보초당, 진샤유적

등록 2009.09.07 11:06수정 2009.09.0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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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보의 흉상이 안치된 시사당.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중국 시문학의 전성기였던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두보의 흉상이 안치된 시사당.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중국 시문학의 전성기였던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 모종혁


 시사당을 지나 자리 잡은 공부사. '공부'는 두보가 청두에서 얻은 벼슬에서 이름을 따왔다.

시사당을 지나 자리 잡은 공부사. '공부'는 두보가 청두에서 얻은 벼슬에서 이름을 따왔다. ⓒ 모종혁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國破山河在)
성 안에 봄이 왔으나 초목만 무성하네. (城春草木深)
시대를 슬퍼하니 꽃을 봐도 눈물이요, (感時花淺淚)
이별이 한스러워 새가 울어도 놀라는구나. (恨別鳥驚心)

봉화는 석 달이나 계속 타오르고, (烽火連三月)
집에서 온 편지가 너무나 소중하구나. (家書抵萬金)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만 짧아져, (白頭搔更短)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조차 못 꽂는구나. (渾欲不勝簪)
- '봄의 소망'(春望) 전문


'봄의 소망'은 내가 고등학교 때 배운 시다. 지은 이는 중국 시문학의 성인(詩聖)으로 추앙받은 두보(杜甫, 712~770)다. 그는 허난(河南)성 공(巩)현 출신으로, 조정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에 오랫동안 살았다. 쓰촨(四川)과 별다른 인연이 없던 두보가 청두(成都)에 오게 된 이유는 안사의 난 때문이다.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명운을 바꾼 대전란이었다. 8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당나라 인구는 무려 70%가 감소했다. 전란 전 890만 호에서 293만 호로 약 3000만 명의 인명이 죽어간 것.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킬링필드였다.

안사의 난은 중흥의 길을 걸었던 당조를 급속히 몰락시켰다. 당 현종은 한때 개원의 치를 이끌었지만, 환관과 외척의 전횡과 부패를 막지 못해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자초했다. 반란은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 시대적 혼란상과 더해져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패한 관리의 수탈로 경제적 기반을 잃은 중소 농민층이 반란군에 적극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서 흥기한 반란군이 장안을 향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현종은 양귀비 및 몇몇 측근과 함께 쓰촨으로 달아났다. 쓰촨으로 가는 도중 양귀비는 황제 측근과 호위군의 강요로 자살했다. 현종도 황위를 태자에게 양위하고 쓸쓸히 남은 생을 보내야 했다.

 두보의 찰흙 상이 안치된 공부사 내부. 지금의 두보초당은 명청시대 때 중수한 것이다.

두보의 찰흙 상이 안치된 공부사 내부. 지금의 두보초당은 명청시대 때 중수한 것이다. ⓒ 모종혁


 공부사 내에 안치된 두보 및 초당의 석비화. 시대마다 중수를 거쳐 모습을 달리한 초당과 두보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공부사 내에 안치된 두보 및 초당의 석비화. 시대마다 중수를 거쳐 모습을 달리한 초당과 두보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 모종혁


두보의 시 세계에는 이런 시대상이 잘 녹아있다. 두보는 현실주의 시인으로 당나라 쇠퇴기 및 전란기 아래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민중의 정서를 잘 반영했다. '봄의 소망'은 안사의 난을 배경으로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된 나라와 거듭된 피난으로 급속히 늙어버린 두보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오늘날 민중시인으로 추앙받는 것과 달리, 두보는 관직에 대한 욕심이 무척 컸다. 원대한 꿈을 성취하고자 쉰 살이 다 되어서까지 과거에 나섰다. 하지만 두보는 과거를 주관하는 고위 관료와 '꽌시'(關係)가 없었다. 글재주는 있었지만, 권력과의 끈도 재력도 없었던 두보는 줄곧 낙방해야만 했다.

늙어서까지 고위 관료가 되어 뜻을 펼치고자 했지만 조정과 시대는 두보를 버렸다. 두보는 이런 절망감을 시 창작으로 승화했다. 특히 안사의 난으로 참혹한 전쟁을 체험하면서, 두보는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과 가슴 저리는 아픔에 주목했다. 전쟁을 통해 진정한 민중시인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759년 두보는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에 와 5년여간 지내면서 시 세계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뤘다. 청두를 떠나 쓰촨 곳곳과 싼샤(三峽), 후난(湖南) 등지를 유랑하면서 지은 수백편의 시는 한층 깊은 민중성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전란기 청두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두보초당은 웬만한 대부호의 정원 못지않게 크다. 오대 시기 시인 위장심(韋莊尋)이 두보가 묶던 초당을 기념하여 정돈한 이래 송, 원, 명, 청나라를 거치면서 두보초당은 성역화 됐다. 두보 가족이 머물던 180㎥ 남짓했던 초당은 오늘날 3만㎥로 커졌다.

초당이 얼마나 허술하고 열악한지는 두보가 지은 한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두보는 '어떻게 하여 천칸 만칸 되는 큰 집을 구하여/ 천하의 가난한 사람 그 집에 들이고/ 기쁨에 넘치는 얼굴을 짓게 하는 그런 집을/ 풍우에 아랑곳없고 산처럼 태연한 그런 집에 살고 싶다'고 푸념할 정도였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으로 잘 꾸며진 지금의 공부사(工部嗣)와는 거리가 멀다.

 청나라 건륭제가 친필로 하사한 소릉초당 석비. 후대에 이르러 두보초당은 황제의 능원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청나라 건륭제가 친필로 하사한 소릉초당 석비. 후대에 이르러 두보초당은 황제의 능원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 모종혁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두보의 열렬한 팬이었다. 두보초당 회랑 길 입구에 있는 이 글자 벽은 마오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두보의 열렬한 팬이었다. 두보초당 회랑 길 입구에 있는 이 글자 벽은 마오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다. ⓒ 모종혁


처자를 둘러업고 장안을 떠나 청두에 온 두보는 여느 동냥패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산시(陝西)와 쓰촨의 경계에서 남긴 시를 도면 두보는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을 따라 산 속에서 도토리를 주웠다. 허기에 지친 처자식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엄동설한이라 손발은 얼고 처음 하는 산일이라 도토리를 주워도 주운 것 같지 않았다. 도토리와 풀뿌리로 연명한 끝에 도착한 청두는 전란의 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문물이 풍부하여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리는 쓰촨인데다, 오랜 친구로 쓰촨 절도사로 있던 엄무(嚴武)가 있어 정착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개울가에 있는 절간의 빈방에 몸을 풀었다. 엄무의 도움으로 사찰 옆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청두에 정착을 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생활이었지만, 마음은 평온했고 시상은 끊임없이 떠올랐다. 두보는 육십 평생 1400여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 중 240여 편이 완화 초당에서 쓴 것이다.

두보초당 중앙에는 두보의 위패를 모신 공부사가 있다. 공부는 두보가 청두에 있을 때 얻었던 벼슬인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郎)에서 유래한다. 공부는 토목부서의 서기 같은 직책으로 말단 관료다.

고대 중국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성 두보의 사당을 말단 관직의 이름으로 지은 것은 왕권통치의 시대 이념을 배경으로 한다. 두보초당은 1500년 명나라 홍치제와 1811년 청나라 가경제 때 대대적으로 중건하는데, 두보가 생전 얻었던 유일한 관직인 공부에서 따와 사당 이름을 지었다.

공부사 내 두보상을 호위하듯 모셔진 후대 시인 황정견과 육유의 찰흙상도 흥미롭다. 황정견과 육유가 두보와 이백에 비견되는 송대의 시인이긴 하지만, 초당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 아마도 사(詞)문학이 흥성했던 송대에 두보의 뒤를 이어 중국 시문학을 발전시킨 공로를 기념하여 두 시인의 상이 모셔졌으리라.

 두보가 머물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초당. 중국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기도 한다.

두보가 머물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초당. 중국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기도 한다. ⓒ 모종혁


 복원된 초당의 대청. 두보는 이곳에서 24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지었다.

복원된 초당의 대청. 두보는 이곳에서 24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지었다. ⓒ 모종혁


두보는 청두에서 무료한 생활을 보냈다. 전란에 당나라가 쇠락하여 안타까웠고 백성들이 고난과 병고에 시달려 한탄스러웠다. 엄무의 추천으로 고대하던 관료가 됐지만, 행복은 짧았다. 765년 친구인 엄무가 죽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두보는 다시 방랑길을 떠났다.

두보는 관절염을 앓는 아내와 자식을 조각배에 태우고 양쯔강(長江)을 따라 내려갔다. 배를 타고 내려가다 잠시 한 곳에 머물고 방랑을 되풀이하길 5년. 어쩔 때는 열흘을 굶다가 이를 불쌍히 여긴 고을 원님이 보내준 곡식으로 주린 배를 채운 일도 있었다.

전란 속에 밑바닥에서 민중의 고난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두보. 위대한 시인은 770년 양쯔강 중류 창사(長沙)에서 사연 많은 일생을 마쳤다. 한해 모자란 육십 평생에서 후반생을 혼란과 전란, 유랑과 방랑으로 일관하다 양쯔강 배 안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일부 유적이 파괴되었던 두보초당은 1985년 박물관으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공부사 앞 초당서옥에는 역대 왕조마다 간행되었던 두보 시의 목판본과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10여 개국에서 출판된 두보 시집도 함께 진열되어 있다. 초목이 우거진 두보초당을 걷다 보면 두보의 시 한 수 저절로 읊어진다.

단비가 때맞추어 내리니, (好雨知時節)
봄은 오고 만물은 싹 트네. (當春乃發生)
바람 타고 밤에 스며들고, (隋風潛入夜)
가랑비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네. (潤物細無聲)

들길도 구름을 따라 어둡거늘, (野徑雲俱黑)
강가에 뜬 배에 호롱불만 밝게 비치네. (江船火獨明)
새벽에 붉게 젖어 물든 곳은, (曉看紅濕處)
금관성(청두)에는 꽃송이가 무거우리라. (花重錦官城)
- '봄밤에 내린 단비'(春夜喜雨) 전문

 진샤유적박물관 발굴전시관은 발굴지 위에 현대식 전시관을 만들었다.

진샤유적박물관 발굴전시관은 발굴지 위에 현대식 전시관을 만들었다. ⓒ 모종혁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발굴전시관 내부. 쓰촨에서 보기 힘든 상아가 발굴되어 고촉국이 동남아와의 교류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발굴전시관 내부. 쓰촨에서 보기 힘든 상아가 발굴되어 고촉국이 동남아와의 교류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 모종혁


두보초당에서 차로 5분 거리에는 진샤(金沙)유적박물관이 있다. 진샤유적은 금세기 중국에서 발견된 최대의 역사유적으로, 기원전 12세기에서 7세기까지의 고촉(古蜀)문명 후기와 연관이 있다. 고촉국은 중국 황하문명의 하상(夏商)조와 버금가는 청동기 문화를 꽃핀 신비의 왕국이다.

1930년대 쓰촨성 광한(廣漢)시 난싱(南興)진 둔덕 세 곳에서 희귀한 문물들이 발견됐다. 정교한 청동기와 금제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특히 커다란 청동두상, 인면조상(人面鳥像), 황금가면 등은 황하문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물이었다.

두상의 얼굴은 큰 눈과 높은 코, 두드러지는 광대뼈 등으로 오늘날 중국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날 산싱두이(三星堆)라 불리는 이 유적은 고촉문명 중기의 중심지로, 신전, 묘군, 공방(工坊) 등으로 구성되었다. 고촉국은 5천년 전 티베트고원에서 민강(岷江)을 따라 평원지역에 내려온 강(羌)족이 중심이 되어 세웠다.

진샤유적은 고촉국이 광한 일대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쓰촨 분지 전역을 짧게는 1500년에서 길게는 1800년까지 지배했음을 증명했다. 고촉국은 작은 부족국가에서 출발했지만 4천년 전에는 강력한 국가 체계를 갖추었다. 산싱두이와 진샤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기와 옥기는 고촉문명의 고도로 발달된 기술문화를 보여준다.

고촉국은 쓰촨에만 고립된 왕조가 아니었다. 북으로는 황하문명과의 충돌과 교류를 반복했고, 남으로는 서남 실크로드를 통해 윈난(雲南), 버마, 인도까지 오고 갔다. 이를 보여주듯, 진샤유적에서는 인도 해안지방이 원산지인 장식용 조개껍질과 동남아의 코끼리 상아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황금가면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흡사하다. 황하문명에다 전 아시아의 문화를 흡수, 융합하여 독자적인 고촉문명을 꽃핀 것이다.

 진샤유적에서는 수만 점의 토기가 발굴됐다. 토기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뚜렷한 기술 진보상을 보여주고 있다.

진샤유적에서는 수만 점의 토기가 발굴됐다. 토기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뚜렷한 기술 진보상을 보여주고 있다. ⓒ 모종혁


 유물전시관 제3전시실에는 진샤유적에서 발굴된 200여점의 금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제3전시실에는 진샤유적에서 발굴된 200여점의 금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 모종혁


2001년 2월 한 부동산개발회사의 인부들이 청두 서북쪽 진샤촌에서 하수도 부설 공사를 하던 중 한 점의 돌 사람상과 원형 석기, 청동기를 우연히 깨냈다. 다행히 주변에서 구경하던 한 시민이 급히 경찰에 신고해 고고학자들이 달려왔다. 공사장 일대에 대한 초보 발굴에도 대량의 돌 사람상, 옥장(玉璋), 청동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진샤유적이 수천 년의 잠을 깨고 세상에 존재를 알린 순간이었다. 2001년 이래 6년간 진샤촌 일대 20여 곳에 대한 발굴을 진행한 끝에 진샤유적의 면모가 드러났다. 전체 면적 10만여㎥에서 금제품 200여점, 청동기 1200점, 옥기 2000여점, 석기 1000여점 등 다량의 고촉문명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제품의 수량과 종류는 고대 중국 유물 중 가장 많고 다양했다.

돌로 만든 인물 및 동물상은 세공이 정교하고 생생했다. 수만 점이 쏟아져 나온 토기와 수백 점의 상아도 이채로웠다. 진샤유적은 산싱두이처럼 과거 신전이 있던 자리로, 제사와 관련된 제기가 그대로 묻혀 있었던 것이었다.

1980년대 이래 청두에서는 고촉문명과 관련된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우친샤오취(撫琴小區), 스얼차오(十二橋), 팡츠제(方池街), 준핑제(君平街), 옌다오제(鹽道街) 등 주요 유적만도 10여 곳에 달한다. 통칭하여 '스얼차오유적군'이라 불리는데, 진샤유적과는 다른 생활 거주지 유적이다.

진샤유적은 면적이 가장 크고 출토 유물이 다양하며 진귀하여 가치가 아주 높다. 유적의 분포와 지리구조, 년대, 문화 성질 등이 수세기에 걸쳐 있어 당시의 생활상, 장례풍습, 종교의식 등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기원전 1700년부터 1200년 사이의 산싱두이를 뒤이어 고촉문명의 발전과 변화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고촉국은 중국 고대 역사서에 수없이 등장하는데, 그동안은 일개 한족의 변방 국가로 인식됐었다. 진샤유적과 산싱두이의 발견은 고촉국이 오랜 세월 동안 독립적인 문명과 국가 체제를 갖춘 이민족 국가였음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진샤유적에서 발굴된 옥기 2000여점은 세공이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진샤유적에서 발굴된 옥기 2000여점은 세공이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 모종혁


 유물전시관 제5전시실에 있는 옥으로 만든 인물상. 제사에 함께 순장된 노예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유물전시관 제5전시실에 있는 옥으로 만든 인물상. 제사에 함께 순장된 노예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 모종혁


2007년 4월 문을 연 진샤유적박물관은 발굴전시관, 유물전시관, 문물보호 및 복원센터, 관람객센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샤유적지와 그 주변을 모두 국가 1급 보호지역으로 묶어,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다. 발굴전시관은 진샤유적의 주요 유물이 발굴된 장소를 거대한 돔형 건물로 덮어 만들었다. 고촉국의 신단 자리로 당시 제사활동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유물전시관은 모두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촉문명의 탄생과 발전, 변화를 체계화하여 보여준다. 산싱두이박물관이 유물 전시에 치중한 것과 달리, 진샤유적 유물전시관은 고촉문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다. 전시된 유물 중 황금가면과 새를 음각한 태양은 가장 중요한 유물만 모아둔 제5전시실 중앙에 있다.

태양숭배사상과 새를 신의 사자로 여기는 관념은 북방 유목민족의 특징이다. 고촉문명이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인 것이다. 지금도 발굴과 연구가 진행 중인 고촉문명. 중국 역사학계는 황하문명과의 밀접성만 집착하지 말고, 고촉문명의 독자성 및 타 문명과의 교류 관계에 더 큰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 여행Tip 1

두보초당은 청두(成都)시 서남쪽 칭화루(靑華路) 38호에 위치하고 있다. 두보초당의 개방시간은 여름철에는 7:30~19:00, 겨울철에는 8:00~18:00이다. 입장료는 60위안(한화 약 1만800원)으로, 단일 유적지로는 좀 비싼 편이다.

두보초당 내에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가이드가 있긴 하지만, 근무하지 않는 날이 더 많다. 가이드비는 100위안(약 1만8000원)이다. 두보초당으로 가는 교통편은 다양하다. 도심 각지에서 출발하는 버스 301, 84, 82, 35, 17번 등이 차오탕(草堂)정거장에서 쓴다. 택시로 갈 경우 도심에서는 15위안(약 2700원), 청두기차역에서는 20위안(약 3600원) 안팎이다.

진샤유적박물관은 청두시 진샤이지루(金沙遺址路) 2호 위치하고 있다. 진샤유적의 개방시간은 여름철에는 8:00~18:00, 겨울철에는 8:00~17:30이다. 입장료는 80위안(한화 약 1만4500원)으로 상당히 비싼 편이지만, 그만한 가치는 한다.

진샤유적박물관 내에는 한국어 가이드는 없고, 영어 가이드는 있다. 가이드비는 100위안이다. 진샤유적으로 가는 교통편은 좀 불편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보초당을 구경한 뒤 택시로 가는 방법이다. 두보초당에서 진샤유적까지 택시비는 약 8위안(약 1550원) 안팎이다.

 춘시루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으로, 언제나 청두 시민들과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춘시루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으로, 언제나 청두 시민들과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 모종혁


 진디호텔은 청두 내 중저가 호텔 중에는 가장 좋은 입지조건과 실내시설을 갖추었다.

진디호텔은 청두 내 중저가 호텔 중에는 가장 좋은 입지조건과 실내시설을 갖추었다. ⓒ 모종혁


# 여행Tip 2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청두에는 춘시루(春熙路)가 있다. 춘시루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청두의 중심 저잣거리다. 1990년대 말까지 춘시루에는 밤마다 중국 3대 야시장이 세워졌다. 지금은 시정부가 도시 환경미화를 내세워 야시장을 없애 버렸지만, 청두에서 가장 오래된 상점이나 맛있는 식당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양한 가게가 몰려 있어 춘시루의 밤은 화려하고 볼거리가 풍부하다. 상점의 울긋불긋한 네온사인은 보행거리 변에 길게 늘어져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춘시루 중앙의 중산(中山)광장에서는 언제나 작은 행사나 공연이 벌어진다. 명동과는 다른 청두의 밤거리를 거닐면서 청두인의 여유로운 밤문화를 엿보는 것은 춘시루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점이다.

가격은 여관급이면서 시설은 중급 이상의 호텔을 원할 경우 더셩루(德盛路) 89호에 있는 진디호텔(金地飯店)이 알맞다. 진디호텔은 1987년에 개업했지만, 2007년에 새로이 리모델링을 하여 내부시설이 깨끗하다. 무엇보다 시 중심가에 있고, 방값도 아침식사와 무료 인터넷을 포함해 싱글베드 룸이 180위안(약 3만2500원), 더블베드 룸이 230위안(약 4만2000원)이다. 호텔 체크인 수속이 빠르고 직원들도 친절하다. 호텔 예약을 위한 전화는 (028)8691-5339, 8692-1388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쓰촨 #사천 #두보초당 #진샤유적 #고촉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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