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 선생은 걸음마 배우듯 조각칼 쓰는 법부터 배우면서 암세포와 싸워왔다.
박준성
교수를 꿈꾼 순박한 시골청년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노동세상> 회의실에 다다랐다. 그와 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첫 질문, "원래 역사학과에 갈 생각이셨나요?" 본래 대학 진학은 장래희망보다는 점수에 맞춰 과를 정하지만, 왠지 그는 자기 신념으로 역사학과를 택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시 우리 지역 국립대에 역사학과가 새로 생겼어요. 고3 담임선생님이 신설학과로 가면 나중에 교수 되기 쉽다고 적극 권하셨지요." 공부를 좋아해서 공부하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단다.
1974년, 교수를 꿈꾸던 청년 박준성은 그렇게 역사학과에 입학한다. 이끌어주는 선배도 없는 신설학과에 간 순진한 시골청년은 생각한다. 교수가 되려면 서울대 대학원에 가야 하고, 그곳에 가려면 학점을 잘 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1학년 때부터 대학생활 절반은 도서관에서 보냈다.
나머지 절반을 보낸 곳은 술집이다.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보장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긴급조치 9호 시대. 어떠한 저항도 봉쇄된 상황에서 역사학과 학생이 갖는 특유의 사명감을 쏟아낼 데는 막걸리 사발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속엔 훌륭한 역사학자가 돼서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해야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생활야학을 하며 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피부로 느꼈다. 맨바닥에 사과상자를 뒤집어 놓고 책상 삼아 가르치고 배우던 그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단다.
강단을 버리고 거리에 서다민에 대한 연민만 있었다면 어쩌면 그는 지금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과 사회모순을 온몸으로 깨우치는 건 천지 차이이기 때문. 대학 교수의 환상을 깨준 한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양심 있는 교수로만 남았을 확률이 높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던 그는 방위 제대 후 바로 조교 임용을 앞둔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였던 당시, 국립대 조교는 공무원 신분에다가 석사학위만 따면 바로 전임 교수가 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게 대학 교수로 가는 길에 막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인생사 좋은 일엔 꼭 장애물이 있기 마련. 방위 제대를 얼마 안 남기고 출신 대학에 인사를 갔다가 후배들로부터 복사된 논문 한 편을 건네받는다. 바로 그가 쓴 학부 졸업논문이 잘못 쓴 토씨까지 고쳐지지 않은 채 학술논문집에 지도교수 이름으로 올라 있었던 것. 이에 그의 후배들이 '논문 도용 교수 물러가라!'고 들고 일어났다. 이럴 때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법. 그는 '배은망덕한 놈' 소리를 들으며 모교를 떠나야 했다. 그 뒤 교수집단의 허위의식에 환멸을 느낀 그는 '강단 안 교수'가 아닌 '거리 위 역사 선생님'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월간 <작은책>에 연재 중인 '추억 따라 역사 따라'에서 당시 '가지 않는 길'을 이렇게 회상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감한다. 세상살이가 잘 풀릴 때도 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더럽게 꼬일 때도 있다.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불쑥 튀어나온 일이 살아 갈 방향을 휘저어 예정에 없던 엉뚱한 길을 걷게 만들기도 한다. 엇박자가 났다고 생각하는 길이 제대로 살아온 길일 수도 있다. 슬픔은 슬픔으로 위로받듯이 과거의 고통은 현실의 어려움을 버티게 하는 면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노동자가 있는 곳이 나의 강의실한창 대화를 이어가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린다. "네, 오후는 졸린 시간이니까 아침 10시에 하는 걸로 하죠." 지방에서 하는 교육인 듯한데 그는 오후보다 오전을 택한다. "투쟁사업장이에요.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인데 원래 내일 하기로 했다가 모레 하면 두 명 더 들을 수 있다고 해서요." 제 몸의 고단함보다 교육 듣는 이들의 상황이 우선인, 천상 교육자다.
"사실은 처음부터 노동자교육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이게 웬일인가. 25년간 노동자교육을 해온 그로부터 나온 뜻밖의 얘기다. 1981년 5월 27일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이었던 김태훈 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면서 도서관 6층에서 떨어졌다. 그때 그는 다른 대학원생들과 함께 도서관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다리가 후들거려 현관 기둥을 끌어안았다. 울부짖으며 몰려드는 학생들 위로 사과탄이 날아들고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지 모를 김태훈 학생의 몸을 최루탄 가스 분말이 하얗게 덮었다. 학생들을 쫓아내고 김태훈을 낚아채가는 전경들을 보면서 그는 "이런 놈의 세상, 공부하면 뭐하나. 때려치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운동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공부 말고 할 일을 물었다. 선배들은 "세상을 바꾸려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면서 그에게 농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근현대사를 써오라고 요구했다. 농민들의 피눈물을 모아 거둔 돈이라면서 작업비도 줬다. 그런데 아무리 쉽게 쓰려고 해도 쉽게 쓸 수가 없었다. 농민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농민의 말투에 익숙하진 않았던 것. 그는 선배에게 "도저히 못 쓰겠습니다. 강의를 좀 하면서 경험을 쌓아 농민들의 말투와 정서에 익숙해지면 써 보겠습니다"고 했다.
그렇게 강의를 수소문하던 그는 1984년 8월, 부천 YMCA에서 첫 강의를 한다.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 겉으론 청년강좌라 했지만 사실은 노동교실이었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했던 그 첫 강의 다음달엔 대학 강의도 시작했다. 거리 위 역사 선생님과 대학 안 비정규직 강사 생활이 동시에 열린 것이다. 그는 지배자가 아닌 낮은 곳 사람들의 역사를 가르칠 곳이라면 파업현장이든 대학 강의실이든 가리지 않았다.
슬라이드에 역사를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