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로 온 사회가 불안에 떨고 있다.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비축하려고 인맥을 동원하는 행태도 등장하고,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전통의학의 가면을 쓴 약장사들이 국민을 현혹한다. 하지만 위기일수록 전체를 파악하고 차분하게 움직이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인간보다 훨씬 먼저 지구를 지배해왔으며 모든 동식물 탄생의 근원인 바이러스, 그중 하나의 종인 신종플루에 대해 알아보자.
플루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독감)의 줄임말이다. 여러 종류 중에서 인간과 동물에게 집단발병하는 플루나 매년 유행하는 계절성 플루는 본격 유행에 앞서 봄에 미리 예측하여 백신을 만들 정도로 우리의 의학수준은 진보해왔다. 플루는 해마다 조금씩 다른 신종이 나오는데, 지금 여기에 '신종'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이유는 수십년을 주기로 크게 유행하는 유난한 녀석이기 때문이다.
신종플루, 4차 대유행으로 번질까
신종플루의 유전형(H1N1)이 1918년 1차대전의 막바지에 번지기 시작하여 세계를 휩쓴 '스페인 플루'와 같다는 점이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스페인 플루는 세계인구의 약 30%를 감염시키고 나서야 진정되었으며, 사망률 2.5%라는 강력한 독성으로 2500만~5000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구 3000만도 안된 조선에서만 14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아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1957년 아시안독감(H2N2)은 사망률 1%로 200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10여년 뒤 다시 찾아온 1968년 홍콩독감(H3N2)은 역시 사망률 1%로 100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우리 귀에 친숙한 조류독감(H5N1)은 과거 10년간 사망자가 1000명을 밑돌지만 사망률이 60%에 달하므로 인간에 대한 감염력이 높은 변종을 항시 경계해야 한다.
신종플루는 지난 넉달간 140여개국의 2만명이 넘는 사람을 감염시켰으며 사망률은 0.3% 정도이다. 해마다 유행하는 플루 사망률의 2~3배이기는 하나 그리 강한 독성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이 결합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춥고 건조한 날씨는 바이러스가 외부에서 더 오래 생존토록 하여 감염력을 높인다. 또한 상기도(코, 인후두 등)가 차갑고 건조한 공기에 의해 얻은 상처가 각종 병균의 온상이 된다. 그리고 겨울마다 찾아오는 계절성 플루, 철새에 의한 바이러스 등이 자연계와 인간 및 동물들 속에서 경쟁하며 한결 독한 바이러스로 진화할 확률도 있다.
불안심리 파고드는 상술이 더 불안
주변에서 이런 질문들이 쏟아진다. 타미플루 빨리 구할 수 없나? 신종플루 안 걸리게 하는 보약은 없을까? 확진검사 쉽게 받는 방법은? 물론 우리집 딸아이가 상기도 감염증세를 보인다면 필자도 덜컹 겁이 날 것이다. 당장 치료제를 구해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아니, 그전에 예방해줄 식품이 있다면 나부터 먹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타미플루를 먹어봐야 약효가 떨어지면 별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내년까지 매일같이 이 약을 먹고 살 수도 없다. 게다가 타미플루는 부작용도 많고 내성도 걱정되는 약이다. 평년의 계절성 플루 유행기와 비슷해지는 현재 한국의 상황(지역사회 유행기)에서는 경미한 증상이나 예방 목적의 타미플루 복용은 무의미하다. 고위험군 또는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에게 선별적으로 처방하면 충분하다.
각종 건강보조식품과 보약들도 국민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다. 타미플루 성분에 중국산 팔각나무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한방스파나 비슷한 약초들이 항바이러스나 면역력을 돋운다며 팔고 있다. 과연 약을 먹어서 면역력이 좋아질 수 있을까. 차라리 지능지수를 높이거나 아들을 낳게 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약초에 지능이 있어 여러 백혈구 중에서 신종플루에 대항하는 백혈구와 항체만 증식시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과도한 면역으로 병이 생기는 천식이나 알레르기 비염, 류마티스성 질환들은 위의 약초를 먹으면 발작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만병통치약은 무협지에나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갈지자 보건대책, 중심을 잡아라
보건당국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반구와 영·미·유럽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지난 넉달 동안 확산단계별 매뉴얼 하나 만들지 않고 무대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부터 인플루엔자 대유행은 경고되었기 때문에 선진국들은 차분히 타미플루를 비축해왔지만 우리의 준비상태는 그들의 10%에도 못 미친다. 더구나 타국의 반값에 백신 경쟁입찰을 붙였다가 참가율 0%라는 국제 망신까지 당한 다음 뒤늦게 몇배의 값을 주며 고개 숙여 구매하기도 했다.
게다가 국내 감염자가 속출하자 별다른 준비나 지원도 없이 수백개의 종합병원을 거점병원으로 지정했다. 민관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시기에 보건소에서는 일반환자 진료를 하고, '집단발병 관리'만 하겠다고 선언하며 민간병의원으로 환자를 내몰았다. 공공의료의 첨병인 3800여개나 되는 보건(지)소와 군병원, 의료원 등지로 환자와 의료진을 모두 집중시켜 2차감염을 줄였어야 했다. 분별없는 정부 방침 탓에 병원 로비와 응급실은 신종플루와 고위험군의 각종 암·중환자들이 엉켜 아우성과 불안이 넘쳐나고 있다. 건강한 학생들 몇명이 감염되어도 휴교와 등교 금지까지 남발하는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대처다.
자연재해 대비하듯 차분한 자세를
플루는 일종의 자연재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벌이는 경쟁의 일면이며, 그 유행이 자연선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도 면역체계에 따른 선택과 보상을 받기 마련이다. 이것은 수천만년을 이어온 역사이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경로에서 유일하게 조금 벗어난 생명체이며, 인류의 역사는 그러한 변화의 범위가 커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종플루는 평년보다 전염력이 강할 뿐 대부분의 사람은 감염되었는지도 모르고 치유된다. 또한 1950년대와 같은 유전형의 플루가 유행한 덕에 1958년 이전 출생자의 30%는 면역(항체)이 있다는 희소식도 들리며, 과거에 없던 타미플루와 리렌자라는 치료약도 존재하고, 임상실험 결과가 상당히 고무적인 백신도 11월이면 보급될 것이다.
전염경로가 뻔한 플루에 대한 최선의 방책은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손을 잘 씻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마스크를 쓰면 충분하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노력이 쌓이면 유행의 폭을 작을 것이며, 고위험군 환자들의 감염도 낮아져 사망자 또한 적을 것이다. 따라서 목전의 신종플루에 대한 관심이 냄비처럼 금방 끓었다 식기보다는,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또다른 급성 전염성 질환이나 자연재해를 대비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보건당국 또한 이런 때일수록 원칙과 상식을 지키고 현장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대처해야 한다. 국난을 극복한 지도자들은 탁상행정에 빠져 책임소재 따지기에 급급한 관리가 아닌 실제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에서 답을 찾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청주성모병원 소화기내과 의사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