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지에 필사한 편지 일부
김수복
사람은 망한 뒤에서야 비로소 철이 든다는 말이 있다. 김용옥 선생의 해설에 따르자면 공자는 이순이 넘어서야 철이 들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이 나라 저 나라 기웃거리고 다닌 것은 정치에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에는 자신의 사상을 펼쳐보일 만한 정치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공자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있었던 셈이다. 몰락한 자리에서 택한 길이 후학 양성이었다.
공자의 사상을 공부하신 조부께서 과거를 볼 당시에는 분명 벼슬을 하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신상의 안위가 보장되는 그 길을 마다하고 서당 훈장으로 떠돌았다. 일제의 개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것은 차라리 부록이었다. 나라의 몰락과 집안의 몰락을, 그 과정을 손금 보듯이 보아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으레 갖게 마련인 충격과 회한 그리고 서글픔, 커다랗게 뚫려버린 구멍을 겪기 마련인데 이 거대한 구멍을 채우는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 후학 양성이었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당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공자께서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러저러한 사정이 그 배경에 있다, 하는 정도였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성찰이 있었고, 성찰의 뒤에 받아들인 것이 노자의 무위자연 철학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그 자신 공부를 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일신상의 안위는 너무도 사치스런 것이었고 고이면 썩는 물처럼 결사항전의 각오로 피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길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호남의 서해안 지역은 지금도 눈이 많지만 당시에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겨 버릴 정도의 폭설이 예사로 쏟아졌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 명절을 지나서 집을 나서면 섣달그믐 즈음에서야 다시 돌아오시곤 하던 조부께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고 있다가 해동이 되었을 때 지금은 청보리밭 축제로 널리 알려진 공음의 한 야산 기슭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아버지를 포함한 집안 어른들은 이 사건을 거대한 수치로 여겼고, 그래서 조부님이 선택한 죽음의 방식은 공공연한 비밀로 남게 되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집안에는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궤짝으로 여럿이나 있었다. 이 책들이 할아버지의 제사 때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 의해 몇 권씩 사라져 갔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고도 못본 체 묵인하고 있었다. 내 나이 열한 살이었던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나는 그나마 몇 권 남아 있는 조부님의 책들을 모두 감춰 버렸다. 그리고 장성한 이후 객지 생활을 하는 내내 그 책들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것을 어느 해 화제로 대부분 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