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 손수건을 두른 그가 있었습니다.
경남6월항쟁20주년기념사업회
혁명가를 꿈꾸던 친구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 학생운동 활동가들 중에는 가장 적극으로 '노학연대' 투쟁에 참가하였습니다. 노동자 집회가 열리는 곳, 파업 투쟁이 벌어지는 곳에 늘 후배들과 함께 연대투쟁을 나갔습니다.
학내 집회에서도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전사'중 한 명이었습니다.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화염병과 쇠파이프, 짱돌을 들고 싸우는 싸움에서 늘 앞장서서 싸우는 투쟁가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늘 혁명을 꿈꾸던 열혈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닌과 볼세비키를 사상의 중심으로 세웠고, 체 계바라를 좋아하였으며 박노해, 백태웅의 사노맹과도 관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990년 혹은 91년쯤으로 기억됩니다. 친구는 그가 속한 조직에서 만든 공개 투쟁조직인 '삼민투 위원장'을 맡았고, 곧 공개 수배 되었으며, 꽤 긴 도피 생활을 그친 후에 체포되어 길지 않은 감옥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 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소위 민중운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학생운동은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하고 그가 속해 있는 조직은 세력이 급속히 약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긴 학교생활을 마감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쉽게 생활인으로 정착하지 못하였지만 약간의 혼란을 겪은 끝에 병원 원무과 일을 시작하였고, 그는 적극적인 성격과 추진력으로 꽤 능력있는 실무자로 인정 받게 되었고 곧 책임있는 자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던 후배와 가정을 이루었고,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된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이젠, 퇴근 후에 광우병 쇠고기 촛불 집회에 참가하여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노틀'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과격함은 많이 사라지고 생활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유시민은 최근에 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앞서 싸운 동서고금의 '투사'들이 이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후불로라도 그 값을 치러지 않으면 온전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다고 말 입니다.
마흔 다섯 짧은 삶을 살다간 친구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선불을 내는 삶을 살다 떠났습니다. 투철한 혁명가의 삶을 꿈꾸던 그는 마흔 다섯 아쉬운 삶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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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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