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형님네 집 마당 한켠에 있는 구유와 솥뚜껑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텔레비전을 보던 정수형님네 집. 이제는 빈 터만 남았다.
김도수
정수 형님네 비좁은 방에서 어린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마을 어머니들이 연속극을 보러와 "너그들은 허란 놈의 공부 안 허고 맨날 텔레비만 보냐"라고 나무랐다. 일일 연속극을 유난히 즐겨보던 어머니들이 계속 들어와 자리가 비좁아지게 되자 눈치가 보이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빠져나갔다.
여름철이면 텔레비전을 아예 마루에다 내놓고 봤다. 마당에 멍석을 서너 개 깔고 마을 사람들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날이 가장 즐거웠다. 장소가 넓어 어르신들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요일 밤에 벌어지는 <MBC 권투>는 진뫼마을 사람들에게 단연 최고의 인기 프로였다. 외국선수와 권투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손에 땀을 쥐며 열심히 응원했다.
우리나라 선수가 큰 펀치를 날려 상대방이 비틀거리거나 혹 다운이라도 되면, 마을 사람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한 방만 더, 한 방만 더"를 외쳤다. 이내 공이 울리면 "에이, 거그서 딱 한 방이 안 터지네"하며 아쉬워했다.
마지막 라운드 종료 공이 울리고, 판정승으로 이겼을 때는 마을 사람들은 "외국 놈도 참 잘 허고만. 고 놈은 팔이 긴 게로 뻗기만 해도 우리나라 선수 얼굴에 닿은게 겁나게 많이 맞았어. 우리나라 선수가 포도시 이긴 거여"하며 대문을 나서곤 했다.
[#풍경 ②] 80년대 초반... 당당히 놓인 '우리 집 안방 TV'80년대 초반, 마을에 대여섯 대가량 텔레비전이 설치되고 있을 무렵 우리 집에도 드디어 텔레비전이 안방에 놓이게 되었다. 남원에서 경찰 공무원을 하던 큰형님께서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사다 드린 것이다.
우리 집에도 당당히 은빛 나는 안테나가 지붕 위로 솟아올랐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채널을 돌리며 프로그램을 볼 수가 있어 나는 너무 좋았다. 부모님께서 좋아하는 흥겨운 국악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면 채널을 고정시켰다. 이때 아버지는 "아따, 그 사람 참말로 소리 잘헌다, 뭔 목소리가 저리도 좋다냐"며 창(唱) 한 대목을 흥얼거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