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푸른숲
뜬금없이 헌혈하고 뒈지게 맞아 죽을 뻔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것도 거의 사반세기나 지난 기억이었다.
중국 밖의 사람들에게 '중국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통한다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으며 나는 줄곧 고등학교 시절 첫 헌혈을 했던 날, 할머니에게 뒈지게 맞아 죽을 뻔하고,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늦은 저녁 온 식구가 둘러앉은 자리에서 어린 손자가 학교에서 헌혈을 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순간, 밥상을 뒤엎을 기세로 역정을 내시며,
"피는 조상님이 주신 것이다. 피를 판다는 것은 조상님을 파는 것이다. 그 짓은 아편쟁이들이나 하는 짓인데, 또 그 짓을 하고 다닐 테냐!"며 손자를 닦달하셨다.
할머니의 역정에 영문을 모르는 손자는 피를 판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기 위해 '헌혈'한 것이라고 감히 설명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랬던 손자는 그 후 할머니께서 아셨더라면 기겁을 하실 일일 테지만, 돈을 받고 피를 파는 '매혈'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피를 기부하는 '헌혈'은 다르다는 것쯤은 개명한 천지에 모를 이 있을까 하며, 헌혈차만 보이면 헌혈을 했고, 적십자사에서 주는 유공훈장인가 뭔가 하는 메달까지 받았다.
그런데 20세기 이전에 태어나 아흔을 바라보던 해에 돌아가셨던 할머니의 육성이 중국인이 쓴 소설 속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피를 판다는 것은 조상을 파는 것이다."작가는 50년대부터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격동기까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통해 피를 판다는 것은 조상을 파는 것이요, 목숨을 파는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피를 팔아야 하는, 아니 팔아야 했던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고단함을 눅눅하지 않은 필체로 가끔씩 배꼽을 잡게 하는 해학을 담아 그린다.
허삼관은 중국 성안 외곽에 살며 생사공장에서 누에고치를 대주는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다. 넉넉하지 않지만, 끼니는 거르지 않을 정도로 살던 그는 고향 사람들과 함께 우연히 피 두 대접(400ml)을 팔아 35원을 벌게 된다. 35원은 당시 중국에서 허삼관 같은 노동자가 반년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못 버는 돈이었다.
"제가 공장에서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이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써 버릴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쓰도록 해야지요."
허삼관의 매혈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혈을 하여 번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는 같은 생사공장에서 일하는 허옥란과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하소영이라는 남자와 사귀고 있었다. 이에 허삼관은 허옥란의 아버지를 만나, 허씨가 아들이 없이 딸만 있으니, 딸을 하소용에게 시집보내면 대가 끊기지만, 자신에게 시집보내면 같은 허씨라서 대가 이어진다고 설득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그렇게 결혼하여 일락, 이락, 삼락 형제를 두면서 갖가지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하지만 커갈수록 큰 아들 일락이가 자신을 닮지 않자, 동네에서는 남의 자식이나 키우는 못난 사람이라는 욕으로 허삼관을 '자라대가리'라고 수군거린다. 일락이 태어난 지 9년이 지난 후에야 일락이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태동하기 시작한 갈등은 일락이 옆집 방씨 아들의 머리를 돌로 내리찍어 병원비를 지불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며 최고조에 이른다.
그런데 이때 허삼관은 병원비 마련을 위해 첫 매혈 이후 10년 만에 두 번째로 피를 판다. 이후 허삼관은 문화대혁명 시절 큰 가뭄으로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던 시절, 가족을 위해 다시 피를 판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가족들에게는 국수를 사 주면서 자신의 피를 판 돈으로 일락에게 국수를 사 줄 수 없다는 허삼관의 심통은 결국 일락과 화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어지는 허삼관의 매혈은 남의 핏줄인 일락이 농촌에 일을 갔다가 몸이 허해져 왔을 때, 한 달도 안 되어 둘째 이락의 상관을 대접하기 위해, 다시 몸이 약해져 간염에 걸린 일락의 치료를 위해 상해까지 가는 먼 여정 길에 목숨을 걸고 4번씩이나 피를 파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허삼관은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자식 교육을 하는 모습만 놓고 보면 불량한 아버지로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일락의 친부가 아님을 알고,
"너희가 다 크면 하소영네 딸들을 강간 해버려라"라고 친아들 이락, 삼락에게 당부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아무렇게나 화풀이를 하는 철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식들을 위해 매혈하는 과정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피를 팔아서라도, 생명을 담보로 해서라도 자식들을 돌보고자 하는 어느 평범한 가장의 모습으로 이 땅 모든 아버지들의 진한 부정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소설 맨 마지막 장에서 허삼관이 그의 아내에게 털어놓는 말을 빌어 '허삼관 매혈기'가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다.
"허삼관이 추구하는 평등이란 그의 이웃들이 그렇듯이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에 그가 아주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 그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는 생활상의 편리함이나 불편 따위엔 개의치 않지만 다른 사람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상실하고 만다. 이 사람의 이름이 '허삼관'일 수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 허삼관이 일생 동안 평등을 추구하였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그의 몸에서 자라는 눈썹과 좆털 사이에서의 불평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푸념하는 것이다.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평생을 평등을 추구하고자 했던 자신의 몸뚱아리조차 불평등함을 안고 있는 부조리를 푸념하는 허삼관을 통해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것이 없지만, 웃고 넘기며 달관할 수 있는 여유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 근원에 대한 답을 찾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푸른숲,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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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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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팔아 봤소? 조상님 팔아 봤소? 아님 말을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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