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당나귀언제나 과묵한, 통 말이 없는 가을 남자 같은
김수복
가을에 만나는 당나귀는 향수를 닮았다. 튼튼한 네 다리에 우직한 몸매, 커다란 귀에 멋대로 흐트러진 갈기를 가졌으면서도 수줍음 많은 소녀처럼 가만히 선 채로 생각에 빠져 있는
당나귀는 가을을 푸념하는 남자를 닮아보이기도 한다.
흔히들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꽃피는 봄날은 여자의 계절로 공인(?)되었다. 여자는 좋겠다. 물론 가을에도 꽃은 핀다. 그러나 봄날에 피는 꽃과는 밀도와 습도가 다르다. 보이지 않게 달려오는 엄혹한 계절을 예감하며 후딱후딱 정리를 해야만 한다. 쓸쓸하다.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가슴에 자꾸 사막 같은 것이 형성되면서 남자는 예정에 없던 상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알 수도 없는 그리운 것에 대한 갈망으로 잠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가을남자의 정서를 당나귀 울음소리에 대비시켜 멋드러지게 묘사한 시인이 있다면 누구인가, 찾아보기로 한다면 아마 백석을 일등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나의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1938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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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손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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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름다운 이국 여인이 나를 좋아해서, 나는 그 여인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산골짜기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알콩달콩 행복을 노래한다는 백일몽 아니 한겨울밤의 꿈, 이러한 공상이야말로 가을에 접어든 남자의 심리는 아닐는지.
마음이 쓸쓸할 때, 희망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자꾸 우스워질 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고 여겨지는 참으로 이상한 정서에 사로잡혔을 때 백석의 이 시를 들여다보면 그 맛은 각별하고 뭔가가 금방 손에 잡힐 듯하다. 그 뭔가를 나는 일단 향수라고 본다.
이때의 향수란 물론 고향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간과는 약간 다른 추상적이고 보다 근원적인 어떤 것이다. 이제는 갈 수 없는, 어쩌면 아예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꿈인듯이 기억인듯이 몽롱하게 참으로 몽롱하게 머릿속을 채색하는 추상화에 이끌려 남자는 길을 나선다. 어디로? 글쎄, 방향을 안다면 아마 길을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남자에게 가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약간의 반성과 체념, 포기 그리고 희망 뭐 이런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진 채로 부글부글 끓어대다가 서서히 질서가 잡혀지는 것, 아무 생각 없이 하늘 한 번 보고 나면 질서 하나가, 다시 또 아무 생각 없이 먼 길을 보고 나면 새로운 희망 하나가 그물에 걸리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것, 그러니 어쩔 것인가. 길을 나서지 않고 배겨날 수 있겠는가. 그 길이 설령 길이 아닌 허망하게도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에 더욱더, 가을에 들어선 남자는 그 길을 걸어보아야지만 살 것 같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