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차례상
김현자
한 번은 어머니께서 시어른 쪽 사촌이며 육촌들을 명절에 잔뜩 불러 모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명절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데 동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동서는 그렇게 친정에 갔고, 난 할 수 없이 모처럼 연휴가 길어 친정에 가려던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명절날 큰며느리가 손님을 대접해야 체면이 선다나. 또 한 번은 연휴 첫날 고속도로를 보며 "저렇게 막히는데 그 먼 전라도까지 언제 갈 거냐?" 하셨다. 안 갔으면 싶은 것이다.
어쨌거나, 누가 가지 말라고 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먼저 친정 길을 포기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내 맘과 내 사정을 알기나 하는지, 나와 결혼 햇수가 비슷한 손아랫동서는 차례 상 물린 후 설거지도 하지 않고 친정으로 도망치곤 한다. 이제 3년 남짓 된 막내 동서 역시 도망치기 바쁘다. 두 동서의 친정은 부럽게도 경기도와 서울이란다.
그런데 정말 섭섭한 것은 동서들이 설거지를 함께 하고 가려고 해도 "어서 빨리 가라"는 시어머니의 재촉과 그걸 뿌리치지 않고 기회는 이때다! 날름 도망쳐 버리는 두 동서다. 가만 생각해보면 처음 몇 년간 손아랫동서는 내 입장을 우선 헤아리곤 했었다. 이런 동서를 막무가내로 떠밀어 보낸 것은 운전하고 갈 시동생만을 헤아린 어머니였다.
내가 먼저 동서를 배려하기도 했다. 살림이 궁한 집안의 같은 며느리라는 동질감과 함께 어차피 나는 멀어서 못가고, 손님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니 동서만이라도 어두워지기 전에 친정에 들어섰으면 좋겠거니 싶어 주방으로 들어서는 동서를 떠밀어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것들이 모두 억울해지는 것을 어쩌랴!
"그럼 동서 보고 좀 일찍 와서 일 좀 하라고 해요. 작년처럼 밤 8시에나 나타나지 말고. 차례 지내는 날 아침에 나타나는 며느리들이 어디 있대요? 왜 동서들한테는 아무런 말도 안 하시는데요?" "걔네들하고 너하고 같니? 너는 큰며느리 아니냐? 그리고 걔들은 직장 생활 하지 않냐."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단지 큰며느리라는 것을 앞세우는 것이 기분 나쁘다. 차례고 제사고 큰며느리인 나만 알아야 하고 나머지는 알 필요조차 없다는 듯, 두 동서가 언제 오든 크게 상관하지 않던 어머니, "지금이 몇 시인데 올 생각을 안 한다"고 펄펄 뛰다가도 그럴싸한 핑계와 함께 봉투를 내밀면 눈 녹듯 사르르 녹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무슨 놈의 직장이 이 시간까지 여자들을 잡아 놓는다니? 그 사람들은 명절도 없다니?…하기야 하루 종일 서서 일했으니 좀 힘들겠니?… 에미야, 좋은 날 공연히 시끄럽게 하지 마라. 내가 나중에 앉혀놓고 말할 테니! "어느 때는 이른 아침부터 음식준비로 바쁘게 허덕이는 내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나서서 두둔하기도 했던 어머니가 결혼 이후 처음으로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명절 전날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내게 큰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어찌 이렇게 화만 내실 수 있을까?
어머님과 남편, 내 맘도 몰라주고 참 서운허요처음 얼마간은 나 역시 이런 동서들이 못마땅해 어떤 결단을 내리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큰며느리의 도리만을 내세우는 어머니가 번번이 방해꾼이 되었다. 기분이나 뇌물에 따라 180도 달라지는 어머니의 심리를 잘 아는 이런 어머니의 심리를 이용하여 막내 동서는 지난 추석에는 저녁 8시에, 설에는 밤 11시에야 나타났다.
이런 지경이고 보면 사람의 도리를 알 만큼 아는 나이의 동서들에게 '자식의 도리'니 '명절 때는 어쩌고' 잔소리 하는 것조차 언제부턴가 귀찮아졌다. 명절이 힘들만큼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내 할 일만 하면 될 것, 사람은 제가 하는 만큼 느끼고 사는 거려니 싶기에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런 동서들도 정말 괘씸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다.
"네 친구들 이번 추석에 외가에 간다든?""가는 애들도 있고 안 가는 애들도 있겠지. 안 물어 봤는데? 그런데 우린 왜 외가에 안가? 엄마도 이번에는 이모들처럼 외가에 가? 엄마는 엄마도 안 보고 싶어?""아빠 힘들어서 어떻게 가니. 요즘 날마다 10시까지 일하잖아. 명절 전날까지 그럴 건데. 아빠도 좀 쉬어야지. 그리고 차도 좀 많이 막히고….""그럼 엄마 혼자서라도 갔다 와! KTX가 있잖아. OO이가 그러는데 그건 안 막힌다던데?"'철부지 내 딸아. 명절날 KTX는 우주열차를 타는 것만큼 타기 힘들단다.…우쒸! 참고 살아도 아무도 몰라주고 명절이고 뭐고 이참에 아무데나 그냥 가버려?'몇 년 전 친정아버지께서 죽음을 넘나드는 위기를 겪은 이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마냥 죄스럽기만 하다. 두고두고 후회스러울 것 같다.
결혼생활 15년 넘도록 어머니는 내게 빈말이나마 친정에 다녀올 것을 권유하거나 물어 본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친정 부모에게도 효도해야 한다는 말은 체면만 앞세운 순 거짓말이다. 사위도 장인장모께 효도해야 한다면서 자기 아들의 불효는 나 몰라라 며느리에게만 도리를 다하라니 말이다. 오죽하면 몇 년 전 혼자가 되어 명절마다 친정에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 친정과 시댁이 가까워 무조건 고향에 가야하는 막내도 그저 부럽기만 하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내 스스로 고향 가는 길을 포기하고 살지만, 가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와 남편이 이젠 참 서운하다. 내가 언제 명절날 일이 많다고 투덜대기를 했나. 실속 없이 큰며느리 도리만 앞세우는 어머니에게 심한 말 한 마디 했나. 친정에 못 간다고 원망을 한 적이 있나. 잘도 포기하며 살았는데 올해는 왜 이리 섭섭하기만 한 걸까? 친정에 갔다 오라고, 처가에 꼭 갔다 오자고 한 마디라도 하면 덜 섭섭하련만!
친정 부모님께 정말 죄스럽습니다마침 아는 언니로부터 명절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이런 글을 쓰고 있노라, 큰며느리인 내 신세를 하소연 섞어 들려주자, 나이 많은 어른 이기려하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가 아니면 가급 이해해드리란다. 동서들 나무라거나 탓하지도 말고 기분 좋은 명절을 보내란다. 열심히 사는 남편을 봐서 참으란다. 언니의 불운한 결혼사를 잘 알고 있기에 언니의 충고가 진심으로 들린다.
내게, 이 땅의 딸과 며느리들에게 명절은 무엇일까. 정말 이렇게 참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방법인가.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인가. 또 다른 큰며느리들도 나처럼 사나? 이제 기껏 하나나 둘만 낳는 세상에 언제까지 큰며느리라는 가부장적인 굴레를 쓰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시'자가 들어가는 사람들과는 죽는 날까지 마음을 진정 섞을 수 없는 것인지…, 요즘 며칠 생각이 참 분분하고 혼란스럽다.
고향이 어디 그리 쉽게 털어지는 곳인가. 게다가 칠순 친정 부모님이 살아계신 곳인데 말이다. "언니 말이 맞아. 알았어!" 대답은 하지만 올해도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귀성객 소식이 끝나고 그 며칠 후까지 아마 우울하리라. 올해도 가지 못한 친정과 친정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과 돌아가시고 나면 한이 될 그 죄스러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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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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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며느리가 명절 전날까지 일을? 이제 제사고 뭐고 다 때려치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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