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방송국에서 삶의 소중한 것들을 배워가는 아이들

순천효산고 HBS를 아시나요?

등록 2009.09.29 09:50수정 2020.08.0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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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순천효산고 교정 이른 아침, 이제 곧 가을 교정으로 아이들이 몰려올 것이다.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방송부 학생들이 있다.

순천효산고 교정 이른 아침, 이제 곧 가을 교정으로 아이들이 몰려올 것이다.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방송부 학생들이 있다. ⓒ 안준철

 

요즘 점심시간에 가을 교정을 자주 걷습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잠깐 짬을 내어 운동장을 한 두 바퀴 돌거나 철봉대에 매달렸다가 교무실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가을에 대한, 혹은 가을을 주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우산을 쓰고 교정을 걸어보는 것도 꽤 운치가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과 일상에 예속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순간순간을 살다보면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가을 교정을 걷다보면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즐겁게 합니다. 음악과 음악 사이에는 청아한 여학생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언젠가는 저도 모르게 그 소리의 진원지인 학교 방송실 문을 두드린 적이 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였지요. 아침 점심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음악을 내보내고 낭송용 대본을 만드는 일들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런 수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교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그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실에서 수동적으로 수업을 받고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학교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광경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가령, 학급별 장기자랑에서 선보일 춤을 만들고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서로 의견을 모으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하나하나의 동작을 완성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수업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a  아침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방송부장 겸 PD 송현준(2년)과 방송부원들.

아침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방송부장 겸 PD 송현준(2년)과 방송부원들. ⓒ 안준철

   
오늘은 교사가 아닌 기자로서 학교 방송실을 방문해보았습니다. 아침 7시 40분, '여기는 HBS입니다'라고 적힌 방송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교실 한 칸 크기 정도의 제법 규모와 설비를 갖춘 방송실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끔 지역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거나 생방송을 하면서 눈에 익힌 광경과 흡사해서 정말 방송국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침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또한 지역 방송국에서 본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방송실 스튜디오 안에서는 두 명의 여학생이 마이크 앞에 앉아 방송 대본을 살피고 있었고,  밖에서는 방송부장 겸 PD인 송현준(2년) 군이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투명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여학생 아나운서들에게 방송시작 신호를 날릴 태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작가와 기술진들도 분주하게 아침방송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방송시작 2분 전. 한 여학생이 무슨 볼 일이 있는지 스튜디오에서 잠깐 나왔다가 손에 방송 대본(작가용)을 들고 있는 저를 보더니 이렇게 당돌하게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아저씨? 너 말조심해라. 네가 한 말 다 기사로 쓸 거야."

"예? 아저씨가 누구신데요?"


다행히도 옆에 서 있던 방송부 지도교사인 김석현 음악선생님께서 아이가 궁금해 하는 저의  신분에 대해서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분은 아저씨가 아니고 우리 학교 영어선생님이야. 그리고 오마이뉴스 기자로 활동하고 계셔. 오늘은 취재차 우리 학교 방송실을 방문하신 거야. 그리고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학교에서 만나는 분들은 처음 뵙는 분이라고 해도 다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인사하면 돼."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이는 전에도 같은 실수를 했던 모양입니다. 눈망울이 유난히 맑아 보이는 아이는 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사실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6개월 동안 영어연수를 받느라 2학기가 되어서야 학교에 나오다보니 특히 올해 신입생들에게는 제가 낯선 이방인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서둘러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송시작 불과 몇 초전의 상황이었습니다. 드디어 방송부장 송현준 군으로부터 방송 시작을 알리는 신호(큐)가 나가고 두 아나운서의  해맑은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온 교정에 울려 퍼졌습니다.

설익은 풋사과 맛이랄까? 그런 맛과 향내가 나는 두 아나운서의 오픈닝 멘트를 들으면서 문득 이 글을 쓴 작가가 누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한 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조유진 선배입니다"라고 선배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어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기사 작성을 위해 몇 가지를 더 물으려하자 방송실 벽에 붙은 칠판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칠판에 적힌 내용들을 살펴보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이름 옆에 적혀 있는 직함(혹은 역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각자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며 소중한 인생 공부를 하고 있겠지요. 방송이 끝나고 두 학생의 말을 들어보니 그런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부에 들어오긴 전에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헛되게 보냈는데 이곳에 들어와서 기계 만지는 법, 카메라 조작, 멘트 쓰는 요령, 가끔은 아나운서까지 해보면서 학교생활을 알차게 보내고 있고,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것들을 이렇게 체험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런데 방송부원이 되기 위해서는 책임감이 있어야 해요. 특히 방송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감을 갖지 않고 일하게 되면 그것이 곧바로 방송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특히 책임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송현준 군)"

"제가 쓴 멘트를 다른 사람이 듣고 공감했을 때가 가장 보람이 있었어요. 가끔 선생님들께서 칭찬해주실 때도 좋았고요. 많이는 아니지만 방송 쪽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흥미도 생기고 제 숨은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서 더 많이 노력하려고 해요. 여기 방송부에 들어와서 귀여운 후배들을 많이 만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뻐요.(조유진 양)

학교방송국(HBS)이 지금의 규모와 설비를 갖춘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개국한 것은 올해의 4월 1일입니다. 학교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배워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꽃이 있으면 그 꽃을 지탱해주고 물과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뿌리가 있듯이 저로 하여금 가을 교정을 거닐며 음악을 듣고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아침 일찍 등교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는 고마운 방송부 학생들과, 어린 학생들을 다독이고 격려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김석현(음악), 강동곤(과학) 두 분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순천효산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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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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