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애액~... 추석의 정수는 '돼지 잡는 날'

추석 전 마을 최대 행사를 회상하며... 오늘 돼지는 죽지 않았다

등록 2009.10.02 19:13수정 2009.10.0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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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돼지 주인이 자유를 존경하다보니 돼지도 우리에 가두지 않고 풀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유를 알게 되면서 민폐가 더러 발생하기도 한다. 가끔은 닭장을 들이받기도 하고, 개들과 시비를 벌이기도 한다. 하여 주인은 이번 추석을 핑계로 이 녀석을 잡기로 했다.

돼지 주인이 자유를 존경하다보니 돼지도 우리에 가두지 않고 풀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유를 알게 되면서 민폐가 더러 발생하기도 한다. 가끔은 닭장을 들이받기도 하고, 개들과 시비를 벌이기도 한다. 하여 주인은 이번 추석을 핑계로 이 녀석을 잡기로 했다. ⓒ 김수복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 신나는 일도 있는 법이다. 내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돼지 잡는 날. 며칠 전부터 학수고대 기다렸다. 생각만으로도 그냥 절로 '신'이 난다. 신, 어떤 사람은 '신명'의 준말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건 모르겠다. 모르는 채로 넘어가자. 추석이 내일이다. 이 마당에 이 사람이 학문을 하랴.


뭐니뭐니해도 추석의 정수는 역시 돼지 잡는 날이 아닐까 싶다. 어떤 아이는 돼지 잡는 현장에 갔다가 며칠씩 밥도 못 먹고 헛구역질을 해 장차 채식주의자가 될 소질을 일찌감치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극소수를 제외하면 돼지 잡는 날은 적어도 보름 전부터 기획과 홍보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던 마을 최대의 행사이자 집단지성이 발현되는 현장이다.

집단지성? 이거 무슨 말을 잘못 쓴 거지? 할 수도 있겠지만 잘못 쓴 말 아니다. 집단지성이 맞다.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추석의 정수는 '돼지 잡는 날'

오래전, 당시의 현장으로 한 번 가보자. 현장은 대단히 소란스럽고 어수선하고 웃음소리도 난무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칼에 자신이 있는 전문가(?) 두 사람만 들어가서 돼지와 안면을 익힌다. 막걸릿잔을 들고 돼지와 눈을 맞추기도 하고, 막걸리 한 모금을 먹이기도 하고, 등이며 목덜미를 긁어주기도 하는 등 다양한 친절로 돼지의 기분을 아주 흥건하고 넉넉하게 해준다.

부엌에서는 돼지 주인이 가마솥에 가득 물을 끓인다. 장작불에 가마솥 물이 김을 내기 시작할 즈음, 전문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노끈을 들고 돼지 뒷다리를 긁어주며 쪼그려 앉는다. 이제 돼지는 곧 네 다리를 하늘로 향하게 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일상에 복무하며 신호를 기다린다.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건만, 함부로 돼지우리 있는 곳으로 달려들지 않고 평소와 똑같이 각자 집안일을 한다. 그러나 손길은 더디고 일을 해도 하는 것 같지가 않다. 무엇인가를 기다릴 때면 으레 나타나는 긴장감이 마을 전체를 감돈다. 이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이들도 함부로 떠들어대지 않고 개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치를 살핀다.

이윽고 멀리서 '꽤애액~~~~' 멱따는 소리가 들려오면 아버지가 집을 나선다.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르고, 개들이 또 꼬리를 흔들어대며 촐랑촐랑 따라나선다. 엄마는 뒤에서 "아이고 다 가버리면 어쩌라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붙잡지는 않고 산적거리 준비에 몰두한다. 고기에 굶주린 자식들이 현장에서 순대 한 점이라도 얻어먹을 기회를 차마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a  과묵한 당나귀를 통해 한 수 배우겠다는 듯, 돼지는 툭하면 당나귀를 찾아간다.

과묵한 당나귀를 통해 한 수 배우겠다는 듯, 돼지는 툭하면 당나귀를 찾아간다. ⓒ 김수복


돼지 멱따는 소리... 이 소리가 난 뒤 모이기 시작했다

돼지 멱따는 소리, 이 소리는 우리가 아주 간편하게 아무 데서나 먹는 순대를 빼놓고는 생각해볼 수 없다. 숨이 끊어지면 혈액이 응고되어 선지를 많이 받아낼 수가 없기 때문에 산 채로 목에 칼을 넣어야만 한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부터 현장에 가지 않고 집에서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 멱따는 장면을 안 보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겠지만, 산 채로 목이 찔려야 하는 돼지에게 바치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돼지를 어리둥절한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가능한 한 조용한 분위기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어쨌든 돼지는 멱이 따졌고 양푼 가득 선지가 받아질 즈음이면 하나 둘 현장으로 들어서는데, 이때부터 분위기는 확 바뀐다. 숫돌에 칼을 갈고, 펄펄 끓는 물을 양동이로 퍼 나르고, 순대 속을 준비하고, 가마솥이 아닌 작은 솥에 물을 붓고, 새로운 불을 지핀다. 이때까지도 보직을 찾지 못한 채 소리나 지르고 있던 사람들은 돼지가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나면 일제히 달려들어 털을 뽑기 시작한다.

털이 어지간히 뽑아지면 이발소에서 쓰는 면도칼을 들고 한 사람이 달려들어 돼지의 전 생애에 걸쳐 묵은 때를 밀어낸다. 족발은 젖이 잘 안 나오는 산모에게 푹 고아먹이면 젖이 잘 나온다 해서 제일 인기있지만, 우선권은 항상 칼을 잡았던 사람에게 있다. 산 채로 멱을 따는 그 어려운 고난의 임무를 다했으니 가장 좋은 부위를 차지하거나 혹은 처분하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술잔 돌리며 끝없이 이어지던 사는 이야기

족발과 머리가 분리되고 나면 마침내 개복이 되는데, 어른들은 침을 삼키기 시작한다. 이쪽에서 한 병, 저쪽에서 한 병, 막걸리가 등장하고, 굵은 소금을 담은 접시와 술잔이 등장하고, 칼도마에서 간이 썰어지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들어 한 점씩 게 눈 감추듯 입에 털어 넣고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말이 나왔음에도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그때쯤 아이들은 무엇을 하나? 아이들이 먹을 것은 아직 멀었다. 순대가 만들어지고 삶아지기까지는 아직도 족히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실망스럽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금방 무엇이라도 나올 것처럼 하는 일도 없이 바쁘게 뛰었지만 전개되는 상황이 점점 실망스러워져서 여자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등을 돌리고 나가 버린다.

생간을 맛있게 먹는 어른들을 보며 야만인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여자아이들만은 아니다. 사내아이들도 '으' 소리를 내며 하나씩 등을 돌린다. 그날 잡은 돼지가 수컷이라면 오줌보로 축구공을 만들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구실이라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아니라면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아이에게는 맛있는 순대가 주어진다.

a  목욕중인 돼지, 외부 온도가 자기 몸에 맞지 않으면 오리와 거위를 쫓아내고 자기가 들어가서 어허.

목욕중인 돼지, 외부 온도가 자기 몸에 맞지 않으면 오리와 거위를 쫓아내고 자기가 들어가서 어허. ⓒ 김수복


아이들의 심사야 그러거나 말거나 어른들은 여전히 바쁘고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앞다리와 뒷다리 그리고 갈비와 등뼈를 분리하고 분리한 그것을 다시 누구에게 몇 근, 또 누구에게는 몇 근 이렇게 분배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다른 한쪽에서는 내장의 오물을 빼내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씻어낸 다음 갖은 양념으로 준비한 선지를 내장 속에 흘려 넣느라 정신이 없다.

이때쯤이면 그동안 아이들 속에 섞여 영문도 모르는 채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개들이 바빠진다. 멀리 내다버린 오물에 코를 처박고 킁킁대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하면 뭔가 먹을 것이 나올까? 아니다. 금방 뭔가 나올 것처럼, 약속이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꼬리를 흔들어대며 이것저것 뒤져보지만, 뱃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공기 중을 떠도는 고기 냄새뿐이다.

어디에 분명히 고기는 있는데 입에 들어오는 것은 없으니 슬슬 짜증이 난다. 그리하여 개들간에 으르렁 으르렁 신경전이 벌어지고, 급기야는 이놈이 저놈의 귀를 물어뜯고 저놈이 이놈의 주둥이를 물어뜯으며 난리를 치다가 '저놈의 개새끼들'하고 달려오는 몽둥이세례를 받고서야 깨갱 슬픈 비명을 지르며 물러선다.

이제 분배도 끝났고, 순대도 다 익었고, 뒤처리도 다 끝났으니 남은 일은 술잔을 돌리며 토론을 하는 것뿐이다. 누구네 아들이 어떻고, 누구네 딸은 어떻고, 누구네 농사는 어떻고 누구네 아버지는 어떻고 어머니는 어떻고 등등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이 나오듯이 너무도 진지한 이야기들이 끝을 모르고 흘러나오는 까닭에 어른들은 좀처럼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집에서는 엄마들이 재료를 준비해놓고 산적의 핵심이라 할 돼지고기를 기다리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다. 한참이나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아버지들, 어떤 아버지는 자기 몫의 고기를 어디에 두었는지 빈손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어떤 아버지는 몇 번이나 땅이 일어서서 시비를 걸었는지 돼지고기에 흙이 절반이나 엉겨 붙어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시기가 시기이고 보면 엄마들도 아버지를 마냥 몰아붙이지만은 못한다.

그렇게 추석이 시작되고 끝나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얘는 사람을 좋아하고 특히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한다.

얘는 사람을 좋아하고 특히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한다. ⓒ 김수복


돼지를 잡는다 해서 갔지만, 한두 시간도 아니고 무려 다섯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성원이 되지 않아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서 성원이라 함은, 칼을 자신 있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최소한 다섯 명을 말한다. 그런데 딸랑 두 명밖에 모이지 않은 까닭으로, 에이 참, 에이 참, 소리만 연발하다가 자동적으로 종료되고 말았다.

전화로 불참 까닭을 물어본즉, 저마다 사연이 있는데 대체로 일과 관련이 있다. 일이란 곧 돈과 직결되는 것이니, 요즘의 추석은 이렇게도 맛이 별로 없다. 하긴 아이들도 요즘은 추석 같은 명절보다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는 한다.

길면 한 달여 전부터, 짧아도 보름 전부터 고대하는 명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 것일까.

#추석 #추억의 추석 #돼지 #구시대의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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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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