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적·식혜 대신 피자·콜라... 요즘 아이들에게 추석이란?

추석날 아이와 함께 먼지 수북한 족보를 꺼내 읽다

등록 2009.10.06 10:08수정 2009.10.0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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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술잔을 받아든 고사리손 무릎을 꿇은 채 술잔을 받고, 공손하게 절을 올리는 모습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아이의 '첫' 성묘의 모습을 담았다.

술잔을 받아든 고사리손 무릎을 꿇은 채 술잔을 받고, 공손하게 절을 올리는 모습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아이의 '첫' 성묘의 모습을 담았다. ⓒ 서부원


추석을 '명절'이 아닌, '공휴일'로 여긴 탓일까. 추석날 가족과 함께 성묘를 다녀왔다는 아이가 한 학급에 절반을 겨우 넘을 정도로 적었다. 고향에 갈 수 없는 실향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성과 귀경 전쟁을 치러야 하는 수도권에 사는 것도 아닌데,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다. 여느 연휴라면 학원 수강 때문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겠지만, 다른 때도 아닌 추석 땐 응급 환자를 위한 병원이나 약국 몇 곳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열지 않으니, 그게 이유가 될 리는 없었다. 어쨌든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은 엉뚱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고향이 다 이곳이라, 제겐 시골이 없어요."
"지난주 추모공원(납골당)에 미리 다녀왔어요."
"엄마, 아빠만 얼른 다녀오겠노라고 해서, 형과 게임하며 집에 있었어요."

올해 성묘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아이들 답변은 대개 이랬다. 사실 성묘는 조상들 묘소를 살피러 간다는 뜻이지만, 자신 또는 아버지 세대 고향인 시골 마을과 가까운 친지들을 찾아가는 것을 두루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성묘를 했는지를 묻는 것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반겨주는 시골에 다녀왔는지를 묻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고향'이 없다. 굳이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면, 도심 한복판 산부인과 병원이 그들의 고향이다. 그러다보니 고향에 대한 애틋함도 없고, 이른바 명절 세시풍속에 대한 정서 또한 삶에서 괴리된 채 박제화 됐다. 그저 설은 세배하고 용돈 버는 날로, 추석은 한복 입고 송편 먹는 날로 여길 뿐이다.

명절 때마다 '민족대이동' 상황을 연휴 내내 생중계하며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강조하지만, 정작 미래세대인 아이들 표정은 그렇듯 시큰둥하다. 한복을 입었지만, 산적과 식혜 대신 피자와 콜라를 찾고, 가마솥 달린 시골집에 가서도 온종일 인터넷 게임과 휴대폰 문자에 이미 푹 빠져버린 그들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를 따라 성묘 가는 것 자체를 매우 귀찮게 여긴다는 점이다. 하긴 자녀가 중학생만 돼도, 성묘 안 가겠다는 아이를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는 부모들이 적잖다. 게다가 성묘 대신 해외여행을 떠나는 젊은 세대가 시나브로 늘어나는 것을 보면 이러다간 자칫 나이든 어르신들만을 위한 추석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겐 고향에서 만날 친척 또한 거의 없다. 얼마 전만 해도 이름을 다 못 욀 정도로 많은 게 '사촌'이었지만, 지금은 고작 한둘에 불과하다. 현재 출생률이 세계 최저인 점을 감안하면 조만간 사촌은 '고어'가 돼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거칠게 말하자면, 차마 떠나지 못해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노인들이 고향의 마지막 세대라면, 지금 아이들은 사촌과 당숙, 재종 등 친척 관계를 일컫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첫 세대다.


본관(관향)을 물어도 제대로 답변하는 아이들이 드물다. 되레 그게 뭐냐며 되묻는 경우도 많다. 모른다고 나무랄 건 아니지만, 해마다 명절을 보내고 제사와 차례를 모시면서도 가족들끼리 본관과 조상에 관한 이야기 한 번 나누지 않았다는 게 의아할 따름이다. 조상에 대한 음덕을 기리는 게 우리의 미풍양속이라면서도 정작 자기 조상이 누구인지 잘 모른 채 명절을 지내고 있는 셈이다.

추석날 큰 애가 학교에서 내준 연휴 숙제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뿌리 찾기'라는 주제의 숙제였다. 고시조와 중시조가 누구인지, 본관이 어디며, 몇 대 손인지를 알아오고, 추석 때 가족과 함께 한 일을 꼼꼼히 적도록 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분명 쉽지 않은 것이지만, 어쨌든 가족끼리 오순도순 모여 앉아 추석 명절의 참뜻을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다.

a 추석날 족보를 꺼내 읽다 아이와 함께 먼지 수북히 쌓인 족보를 꺼내 읽었다. 족보를 읽어내려가는 아빠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내내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추석날 족보를 꺼내 읽다 아이와 함께 먼지 수북히 쌓인 족보를 꺼내 읽었다. 족보를 읽어내려가는 아빠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내내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 서부원


그냥 숙제 종이에 답 적듯 할 수 없어서, 아이와 함께 앉아 족보를 펼쳐보기로 했다. 손도 잘 닿지 않는 책장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터라 먼지가 수북했다. 하긴 언제 꺼내봤는지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장손인 맏형이 짬 날 때 읽어보라며 한 권 건네주기에 받은 것이니, 그때 이후로 한 번도 꺼내보질 않았던 것 같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 면면을 살펴보았다. 모든 내용이 한자로 돼 있는데다, 이름들이 대개 낯선 글자라 큰 옥편을 뒤적여가며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족보 보는 방법이 특이한데다,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 방식이 무척 신기했는지 아이는 지루해하지 않고 외려 재미있어 했다.

또, 얼마 전에는 수업 시간에 송편을 빚는 연습을 한다며 지점토를 준비해가기도 하고, 한복의 유래에 대해 인터넷에서 직접 찾아 조사해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추석과 서양의 추수감사절을 비교하는 숙제를 열심히 하는 모습도 보았다.

적어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이렇듯 명절과 전통문화에 대한 내용을 교육과정에 삽입해 명절 즈음해 꾸준히 가르치는 듯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것들이 아이들에게 그저 귀찮고 쓸데없는 것쯤으로 내몰리고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중학교 1학년만 해도 영어, 수학 문제를 풀어오라고 할지언정 추석 연휴라 해서 명절과 관련된 숙제를 내주는 곳은 거의 없다.

함께 '뿌리 찾기' 숙제를 하며, 당숙과 재종이 뭔지, 본관이 어딘지도 모른 채, 성묘 가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지금의 많은 중학생들이 초등학교 1학년인 내 아이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손 붙들고 끌고 다니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세시풍속에 대한 책을 함께 읽고, 추석과 성묘에 담긴 뜻을 찾아 공부하기도 하며, 하다못해 송편이라도 함께 빚어보면서 명절에 대한 '감각'을 꾸준히 유지시켜주는 것이 기성세대로서의 역할이 아닐는지.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하려고 족보를 꺼내 읽어본 덕인지, 아이가 성묘 가서 할아버지 산소에 술잔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무릎을 꿇은 채 향불 위에서 술잔을 돌리고 공손하게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돌 이후 지금껏 줄곧 데리고 다녔지만, 아이에게 성묘란 그저 가족과 함께 산소로 소풍가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술잔을 받고 절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적어도 시조가 누군지, 본관이 어딘지, 몇 대 손이며 증조부, 조부의 성함은 무엇인지 정도는 세월이 흘러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성묘 가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추석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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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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