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가마터분포도고려시대 청자가마터가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 설치된 국가 국영 도자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과 비교해 보면 분청사기 가마터의 분포도가 얼마나 전국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색이 뚜렷한 독특한 도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한겨레출판
그런데 하필이면 세종시대에 이 인화문 분청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이 물음은 왜 한글을 만들었고, 왜 자주적인 달력인 '칠성산내편'을 만들었느냐 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왜 측우기를 만들고 수표를 만들고 해시계를 만들고 물시계를 만들고 농사직설을 만들었느냐 묻는 것과 같습니다. 대답은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의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 얼마 되지 않아 만드는 장인의 이름을 도자기에 새겨 넣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자 최고급 도자기를 만들지 않으면 도공들도 살아남기 힘들어졌습니다. 고려청자는 철저하게 주문 제작이라 비용이야 얼마가 들든 원하는 명품만 만들어내면 되었지만 분청자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려 324개나 되는 자기소들은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600년 전인 세종시대에 시장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성숙한 지금에서야 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자기소들로서는 목숨을 걸고 고급 분청사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도공들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운이 좋은 곳도 있었습니다. 질이 매우 좋은 흙이 나는 경상도 상주와 하동 그리고 경기도 광주는 그래서 최상급 분청사기를 만들어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런 운 좋은 몇몇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어진 흙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손재주가 좋기로 우리 민족이 세계 최고 아니겠습니까? 지금 보아도 최고 명품으로 꼽힐 만한 분청사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부터입니다. 이름을 걸고 만드는 것이니 최선을 다했던 것이지요. 그야말로 혼신을 다한 그릇은 그릇이 아니라 예술품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로 '인화문' 기법이 등장합니다. 같은 무늬를 자유로우면서도 규칙적으로 빼곡하게 만들어내면 흙이나 유약이 가진 단점은 장점으로 변합니다. 이런 수법을 쓰면 아무리 질 낮은 도자기라도 제법 멋지게 변합니다.
이렇게 해서 분청사기는 한 단계 뛰어올랐습니다. 백성들 모두가 예술적 가치를 가진 도자기를 쓸 수 있게 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도자기의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할까요?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우리글과 말을 쓰고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글과 분청사기는 같은 정신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분청사기토기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면 어디서든 만들어지고 어디서든 발견됩니다. 저장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토기는 처음 모두에게 공평했습니다. (물론 청동무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청자는 처음부터 그렇지 못했습니다. 청자는 신분의 상징으로 출현했습니다. 청자를 손에 쥔 사람은 세상을 얻은 사람들이고 그들을 위한 가마는 특별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다릅니다. 분청사기는 처음 토기가 그러했듯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만들어졌습니다.
해마다 도자기 축제가 열립니다만 분청사기 축제가 열리는 곳은 청자나 백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분청사기는 마을 사람들과 숨 쉬고 마을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 만들어져 그 어떤 도자기보다 서민적이고 마을색이 강합니다.(대략, 전라도의 상징은 덤벙분청자, 조화 박지 분청자, 충청도 분청사기는 철화분청자, 경상도의 상징 인화분청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찮은 마을이 질 좋은 흙으로 분청사기를 만들기는 점점 어렵고, 설령 질 좋은 흙이 있더라도 공물로 바치고 나면 결국은 다시 질이 떨어지는 것들만 남게 됩니다. 특산품으로 나라에 내는 세금을 공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쓰는 분청사기는 더욱 더 흙이 좋지 않았습니다. 절묘한 기법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마을에서입니다.
귀얄이라는 붓이 있는데 이것을 백토를 갠 물에 담갔다가 만들어 놓은 도자기에 쓱쓱 발라 구우면 빗질 자국이 멋지게 남은 분청사기가 됩니다. 이것을 '귀얄문 분청사기'라고 합니다.